세계대회에 한국 대표를 파견하는 중요한 지표로 활용되는 ‘한국 바둑 랭킹’에 점수 오류가 발견돼 파문이 일고 있다.
23일 쿠키뉴스 취재 결과를 종합하면, 최정 9단과 여자 랭킹 1위 경쟁을 펼치고 있는 김은지 9단의 랭킹 점수 계산에 문제가 있었던 걸로 드러났다. 한국기원이 공식 집계하고 발표하는 한국 바둑 랭킹은 ‘시드권 배정’ 등에 활용되고 있는데, 김은지 9단과 최정 9단은 지난해 8월부터 근소한 차이로 접전을 이어오고 있다. 김은지 9단이 2024년 8월 랭킹에서 처음으로 여자 랭킹 1위에 등극했고, 이후 최정 9단이 왕좌를 탈환했으나 지난 6일 발표된 새해 첫 랭킹에선 다시 김 9단이 1위에 올랐다.
문제는 지난해 10월 5~6일 열린 제4회 난설헌배 전국여자바둑대회 결승 3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대회에서 김은지 9단은 결승 1~2국을 연달아 승리하면서 종합 전적 2-0으로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우승을 했음에도 랭킹 점수는 변동이 크지 않았는데, 김은지 9단이 결승 상대였던 허서현 5단을 상대로 이길 가능성(승률 기대치)이 83%(0.838, 0.833)를 상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 9단은 한 판당 2점씩, 결승전 두 판을 이겨 4점을 획득했다.
반면 최정 9단은 지난해 12월3일과 9~10일 열린 제8회 해성 여자기성전 결승 3번기에서 스미레 3단에게 1국을 패배하면서 종합 전적 2승1패로 승리했음에도 점수가 2점 상승했다. 1국을 져서 8점을 잃었지만 2국과 3국 승리로 각각 5점씩, 도합 10점을 획득한 결과다. 원인은 한국기원에서 운영하고 있던 ‘승률 기대치 상한선’ 제도 때문이다.
최정 9단은 지난해 7월5일에도 스미레 3단과 2024 닥터지 여자 최고기사 결정전 승자조 4강에서 맞붙었는데, 이 대국에선 승리하고도 점수를 2점 획득하는 데 그쳤다. 스미레와 대결에 대한 최정 9단의 기대 승률은 86%(0.860)였고, 김은지 9단이 허서현 5단에게 승리했을 때 얻은 점수와 같은 2점을 얻었다. 그러나 제8회 해성 여자기성전 결승 3번기에선 ‘승률 기대치 상한선’ 제도에 의해 최정 9단의 기대 승률이 65% 미만(0.649)으로 책정되면서 패할 때는 점수가 8점만 하락하고, 승리할 때 판당 점수가 5점 오르는 현상이 발생했다. 해당 제도는 최 9단에게는 적용됐지만 김은지 9단 점수에는 반영되지 않았다.
거의 동등한 기대 승률을 갖고 대국에 임했음에도 김은지 9단은 판당 승리 후 2점, 최정 9단은 승리 후 5점을 얻었고, 결승전 승리 2승 누적 결과로 보면 이 차이는 6점까지 벌어진다. 최정 9단이 김은지 9단의 1위 자리를 다시 탈환했던 2024년 9월 랭킹 점수를 보면 최 9단은 9486점, 김 9단은 9481점으로 두 기사 점수 차이가 5점에 불과하다. 지난해 연말인 2024년 12월 기준으로는 6점 차이로 최정 9단이 1위, 올해 1월은 반대로 6점 차이로 김은지 9단이 1위에 오르는 등 두 기사는 10점 이하의 점수 차이로 경쟁하고 있다. 문제가 제기된 이후 한국기원 측은 랭킹 점수에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한국기원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한국 랭킹은 상대 대국자와 승률 기대치 등으로 계산이 되는데 번기 승부일 경우 해당 시리즈에서 승리하더라도 점수를 잃게 되는 모순이 발생할 수 있다”며 “이런 모순을 방지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번기 승부에 한 해 승률 기대치 상한선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지난해 열린 난설헌배는 이전까지 결승전이 단판 승부였는데 해당 대회부터 3번기로 변경되면서 바뀐 부분이 적용되지 않았다”면서 “한국기원은 이 부분을 바로 잡고 추후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더욱 면밀히 랭킹 시스템을 점검하고 관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바둑계 관계자는 쿠키뉴스에 “승률 기대치 상한선을 적용하는 것이 맞는지 논의가 필요하다”면서 “번기 승부를 한 판 한 판 각각 개별적인 대국으로 볼 것인지, 전체 승부로 볼 것인지 관점 차이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쿠키뉴스와 통화에서 “원칙적으로는 승률 기대치 상한선 없이 개별 승부로 점수가 책정되는 것이 맞다고 본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랭킹 점수를 한국기원 담당자가 수기로 입력하고 있는 현재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자동화된 랭킹 프로그램을 활용하면 이와 같은 오류를 줄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한편 한국기원은 잘못된 부분은 소급 적용해 랭킹을 바로잡겠다는 방침이다. 김은지 9단이 출전한 대국 중 앞서 언급한 제4회 난설헌배 전국여자바둑대회 결승 3번기 외에도 제5기 이붕배 신예 최고위전 본선 8강 3번기 등 번기 승부로 펼친 다른 대국에서도 같은 오류가 발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