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협한 민족주의 넘어 ‘존경받는 선진국’으로 나아가자 [조희연의 공존사다리]

편협한 민족주의 넘어 ‘존경받는 선진국’으로 나아가자 [조희연의 공존사다리]

폐쇄성에 맞서는 열린 응전(應戰)으로, 지구촌 선진국 되자
글‧조희연 전 서울특별시교육감

기사승인 2025-02-03 06:00:06
조희연 전 서울특별시교육감. 사진=쿠키뉴스DB

우리는 김구 선생의 ‘꿈’을 기억한다. 우리나라가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길 바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길 바랐던 꿈.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며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이웃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라고 역설한 그의 소망에는 물질적 풍요가 아닌 문화적 품격을 통해 함께 행복해지고 싶다는 간절함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에 ‘문화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으니 김구 선생의 꿈은 어느 정도 실현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그의 꿈이 여기서 그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김구 선생이 열망한 것은, 단순히 문화적 콘텐츠가 풍성한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나는 그가 착취와 지배로 얼룩진 관계를 극복하고 수평적 다양성과 다름의 영역에서 기쁨을 나누며 ‘남에게도 행복을 주는 나라’를 바랐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 본다. 그리고 이제 그 뜻을 이어 ‘문화선진국’의 지위에 올라선 대한민국이 상처와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고 도덕적 영감과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존경받는 나라’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를 지킨 저항적 민족주의

B. 앤더슨은 민족주의의 탄생 과정을 분석하며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y)’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한 지역의 주민들은 새로운 지배 세력이 들이닥치면 저항하는 과정에서 ‘우리’라는 인식을 훨씬 선명히 한다는 것이다.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한민족의 역사다. 수없이 반복된 외세의 침략을 거치며 우리는 ‘민족’이라는 이름으로 정체성을 지켜왔다. 중화주의와 일본 제국주의를 이겨내는 과정에서 ‘저항적 민족주의’는 우리를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다.

독립을 거치며 민족주의는 외세의 지배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국가 건설에 대한 열망의 표현이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권위주의 지도자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한민족의 ‘에토스’를 ‘조국 근대화’라는 기치에 결합했다. 개인과 민족, 국가를 한 덩어리로 엮어낸 것이다. 산업화 고도성장의 시절, 민족의 영광은 곧 개인의 영광이자 국가의 영광이 됐다. 그리고 그렇게 끓여낸 정서적 열망은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되는 경이로운 경제성장의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성찰적 인식의 필요성

하지만 이제 저항적 민족주의가 가졌던 긍정적 동력은 잇되, 그 어두운 그림자도 성찰해야 하는 시기에 접어들었다. 우리는 중국의 ‘굴기론적 민족주의’가 보여주는 공격적 태도나 일본 아베 정권식 민족주의의 편협함과 몰(沒)역사성을 똑똑히 보았다. 선진국의 반열에 당당히 오른 오늘날 우리가 그들과 같은 길을 갈 수도 있지는 않을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성장의 역설’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최빈국이던 대한민국은 어느덧 세계 시장을 누비는 다국적 기업을 여럿 거느릴 만큼 성장했다. 영토가 아닌 시장으로 개척하는 ‘신(新)식민주의’가 대두되는 오늘날 우리가 한때 서구 열강을 비판하며 들이댄 잣대가 스스로에게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한다. 전 세계 플라스틱 배출량 3위라는 사실은 우리에게 뼈아프다. 글로벌 시장에 뛰어든 한국 기업이 현지의 노동력을 착취하거나 인권 침해를 자행하는 사례도 있다. 세계 속의 우리 모습을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다.

세계시민형 민주시민교육

교육감으로 재직하던 시절, 나는 미래세대가 ‘세계시민형 민주시민’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큰 방향성을 세웠다. 지난 10여 년간 교육혁신의 방향도 미래세대를 민주시민으로 키우는 데에 초점이 맞춰졌다. 권위주의와 맞서 싸워온 민주화의 정신을 물려받아, 우리 아이들이 권위에 순응하는 백성이나 국민이 아닌,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떳떳이 주장할 줄 아는 시민으로 자라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국경이 낮아지고 초국가적 통합이 이뤄지는 오늘날, 우리의 미래세대가 국수주의적 민족주의에 갇힌다면 다가올 세상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열린 민족주의, 국제주의적 감수성을 지닌 민주시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한 나라는 최상위 시민을 대하는 방법이 아닌 최하위 시민을 대하는 방법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넬슨 만델라의 말을 생각해 보자. 국경 없는 시대에 우리는 다른 나라, 다른 시민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특히 문화적 관점에서 말이다.

한때 우리가 가졌던 약자의 시선

민족주의 정서가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가 바로 ‘스포츠’일 것이다. 우리는 프리미어리그에서 손흥민 선수가 골을 넣고 메이저리그에서 김하성 선수가 홈런을 치면 유난히 기뻐한다. 축구를 유난히 좋아하는 나 역시 국가 대항전을 보며 팔레스타인이나 우크라이나처럼 국가적 어려움을 겪는 팀을 마주할 때 잠시라도 그들의 선전을 빌어보다가는 막상 우리 팀이 골을 터트리는 순간 박수와 환호를 연발하게 된다.

70년대, 메르데카컵에서 한국이 우승하면 국민 전체가 열광하던 시절이 있다. 강대국을 상대로 약소국이 승리했을 때 맛보는 환희는 경쟁에서의 승리나 억압에서의 해방과도 같은 쾌감이 있었다. 문화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강국이 된 오늘날, 그때의 ‘약자의 시선’을 다시 떠올린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욕을 하며 승리만 바라는 전투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각자의 팀을 있는 그대로 응원하되, 약자의 시선과 상대의 마음도 모두 헤아리는 ‘성숙함’이다.

ODA 캠페인에 참여하면서

나는 보수 성향 인사들, 특히 기독교계에서 주도하는 ODA(공적개발원조) 캠페인에 참여한 바 있다. 이미 선진국이 된 한국이 지구촌의 가난한 나라들을 위해 더 많은 공적개발원조를 해야 한다는 취지다. 현재 우리의 해외 원조는 국민총소득(GNI)의 0.17%로,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회원 30개국 중 16위에 해당한다. OECD가 권고하는 0.7%와 비교하면 훨씬 낮고, 어떤 분들은 ‘존경받는 나라’가 되려면 이를 1%까지 높이자고 제안하기도 한다. 물론 ODA 예산을 늘리는 것 자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는 아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여러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할 지점이라고 믿는다.

문화강국 대한민국, 존경받는 선진국으로 나아가자

BTS의 노랫말은 청년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안겨주고, 영화 <기생충>과 드라마 <오징어게임>은 적자생존과 계층 불평등을 고발한다. 이들이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이유는 공감과 희망,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 대한 고발이 우리만의 것이 아닌 지구촌 모두의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참혹한 현실을 미러링(Mirroring)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는 경로를 상상하고 실험한다면 우리는 진정 존중받는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절 ‘피억압자’의 감수성은 잃지 않되, 대한민국에 대한 애정의 끈을 붙들고 국경 너머로 이어지는 공존과 공생의 가치를 추구하자. 폐쇄성에 맞서 ‘열린 응전’을 선택하고 우리 앞에 직면한 무수한 문제점을 ‘국제적’ 시각에서 이겨내자. 인간성을 중시하며,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었을 때 나는 우리 대한민국이 진정으로 존경받는 선진국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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