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장기 기증이 이를 가능케 한다. 생명을 나누는 장기 기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세상에 남기는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다. 이식이 필요한 환자들은 수년의 시간을 힘겹게 버티며 기적을 꿈꾸지만 기증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쿠키뉴스는 4편에 걸쳐 생애 마지막 순간 고귀한 나눔을 실천한 이들과 새로운 삶을 건네받아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장기 기증의 숭고함을 조명한다. [편집자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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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 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들이 많다. 이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기증자뿐이다. 기증자 예우가 지금보다 강화되고, 기증을 활성화할 수 있는 제도들이 입법화되길 바란다.”
이삼열 한국장기조직기증원 원장은 지난달 24일 쿠키뉴스와 만나 “작년 여러 일로 인해 국내 장기 기증 문화가 침체 상태에 놓여 있다”며 이같이 밝혔다. 지난해 5월 취임한 이 원장은 한림대강동성심병원에서 외과 전문의로 근무하며 신장·췌장 이식을 집도해온 장기 이식 전문가다.
2009년 설립된 보건복지부 산하 기관인 장기조직기증원(KODA)은 병원에서 뇌사 추정자나 기증 희망자가 생겼을 때 이식 대기자에게 연결해 주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장기 구득, 기증자 장례 절차 지원, 유가족 심리 지원 서비스 등을 시행하고 있다.
이 원장은 “한 사람의 기증을 통해 8~9명의 이식 대기자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부여할 수 있으며 피부, 관절, 뼈, 혈관 등 인체조직 기증을 통해 100여명에 이르는 사람에게 건강한 삶을 선물할 수 있다”며 “장기 기증 만큼 숭고하고 고귀한 행위는 없다”고 말했다.
KODA에 따르면 매년 400명 이상이 장기 기증으로 누군가에게 새 생명을 전하고 세상을 떠난다. 뇌사자 기증 건수는 2020년 478건, 2021년 442건, 2022년 405건으로 코로나19 유행의 영향으로 저조했지만 2023년 483건으로 회복세로 돌아섰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장기 이식 대기 환자가 수년간 기증자를 기다리다 숨을 거둔다. 2022년과 2023년에 사망한 이식 대기자는 각각 2918명, 2907명으로 3000명에 육박했다. 하루 평균 8명꼴이다. 이식 대기자는 해마다 늘고 있다. 2019년 3만2990명이던 대기자는 2023년 4만3421명으로 5년 새 1.3배 증가했다. 대기 기간도 점차 길어져 지난해 기준 신장 이식을 받으려면 평균 2802일을 기다려야 한다.
장기 기증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기증 활성화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장기 밀수 등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극중 소재로 다뤄지며 기증을 둘러싼 오해가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원장은 “장기 밀매·적출 등 불법적 일들이 해외에선 문제가 되고 있다지만 국내에선 근절된 지 오래됐다. 영화 속 이야기에 불과하다”면서 “KODA는 경제적 대가를 바라고 이뤄지는 기증은 아닌지 철저하게 평가하며, 가족 간 생체 이식이더라도 강압적 압력에 의해 행해지는 건 아닌지 들여다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기 기증 관련 입법이 지지부진한 점은 아쉽다고 했다. 의료계에선 ‘순환정지 후 장기 기증(Donation after Circulatory Death, DCD)’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DCD는 심정지 환자에 대해 본인의 사전 동의에 따라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고 5분간 기다린 뒤 전신의 혈액 순환이 멈췄을 때 장기를 적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절차다. 한국의 장기이식법은 뇌사자 장기 기증 절차만 규정하고 있다. 심정지로 사망한 사람에 대한 기증 절차는 마련돼 있지 않다. 이에 기증을 할 수 있는 자의 범위를 현행 뇌사자에서 연명의료 중단자까지 넓히는 법안이 국회에 발의된 상태다.
이 원장은 “미국은 전체 기증 건수 중 DCD가 2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스페인은 절반에 달하는 등 선진국에선 많이 이뤄지고 있다”며 “한국도 DCD 제도가 도입되면 이식 대기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10여년 전부터 대한이식학회와 KODA 등이 DCD 도입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면서 “현재 여러 사안으로 인해 도입 논의가 지연되고 있는데 올해는 꼭 법안이 통과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불의의 사고로 뇌사에 빠졌을 때 본인이 장기 기증을 동의한 경우 가족이 반대하더라도 기증 절차를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안도 국회에 발의됐다. 이 원장은 “한국은 본인이 기증을 희망하더라도 가족의 동의가 있어야만 기증이 가능하다”라며 “보호자의 뜻도 중요하지만 기증 희망등록을 했다면 숭고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 원장은 특히 장기 기증자와 유가족을 위한 정부 차원의 추모 공간 조성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는 “추모 공간 확보를 위해 지자체와 협의를 이어가고 있으며, 국회 공청회 등을 개최해 입법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라면서 “기증자들을 기리고 생명 나눔의 소중함을 일깨울 수 있는 정부 차원의 공식 추모공원이 조성될 필요가 있다”라고 강조했다.
1년째 지속되고 있는 의료 현장 혼란도 속히 정상화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지난해 장기 기증 건수는 397건을 기록했다. 뇌사 장기 기증자가 400명 이하를 기록한 건 2011년 368명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이 원장은 “하루빨리 의료 환경 문제가 개선돼 기증이 정상화되길 바란다”라며 “기증 활성화를 위해 각 병원과 최대한 협조하고 적극적인 홍보를 펼치겠다”고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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