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얼빈 헤이롱장 빙상훈련센터 다목적홀에는 빨간 경기복을 입은 중국 선수들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눈에 띄었다. 한국명 임효준, 중국명 ‘린샤오쥔’이 그 주인공이다.
오성홍기를 달고 첫 종합국제대회에 출전한 린샤오쥔은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쇼트트랙 종목에서 가장 돋보인 중국 선수다. 개인전 싹쓸이를 노리던 한국을 저지한 유일한 선수기도 하다. 린샤오쥔은 남자 500m 금메달, 1500m 은메달, 5000m 계주 동메달을 획득하며 중국 쇼트트랙 ‘에이스’로 활약했다.
린샤오쥔의 활약에서 백미는 역시나 남자 500m였다. 한국 대표팀 주축인 박지원과 맞붙은 그는 2바퀴 남은 시점에 선두 박지원 뒤에 머무르고 있었다. 마지막 바퀴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 린샤오쥔은 속도를 붙여 치고 나왔고 박지원의 아웃 코스를 공략해 1위로 골인했다.
500m 금메달을 따낸 뒤, 린샤오쥔은 중국 대표팀 전재수 코치와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 팬들의 관심이 모인 대회에서, 중국 귀화 후에도 건재함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그의 눈물은 단순한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경기를 뛰기 위해 타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방랑자의 아픔을 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린샤오쥔은 명실상부한 한국 대표팀 에이스였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당시 1500m 금메달을 차지하며 차세대 남자 쇼트트랙을 이끌어갈 재목으로 각광받았다. 1년 뒤에는 기량을 완전히 만개했다. 2019년 월드컵 시리즈 개인 종합 우승, 세계선수권 4관왕 등 우승 트로피를 쓸어 담았다. 안현수, 고(故) 노진규 등을 이을 최고의 재능이라는 평가가 잇따랐다.
그러나 한 순간의 사건이 그의 운명을 뒤바꿨다. 2019년 6월, 진천선수촌에서 훈련하던 린샤오쥔은 황대헌의 엉덩이를 때리는 장난을 쳤다. 이때 실수로 바지가 벗겨져 엉덩이가 일부 노출됐다. 여자 선수들에게 같은 행동을 한 황대헌은 자신이 이에 당하자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하며 대한체육회에 성희롱 신고를 했다.
대한체육회는 고소인 황대헌의 말만 듣고 곧바로 징계 절차를 밟았다. 신고한 지 약 두 달 만에 임효준에게 1년 자격정지 처분을 내렸다. 린샤오쥔은 대한체육회 스포츠공정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지만 ‘기각’이라는 허무한 결과를 받았다.
린샤오쥔은 대법원까지 간 긴 재판 끝에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재판부는 성적인 의도가 없었고, 당시 분위기나 행동 동기를 신중하게 고려한다면 이 사건 행위만이 성적수치심을 일으킨다고 보기 어렵다고 했다.
하지만 무죄를 받은 때는 이미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한국에서의 부정적인 이미지, 억울한 징계 등을 떠안은 린샤오쥔은 중국 귀화를 선택했다. 이 선택으로 그의 선수 커리어는 완전히 꼬였다. 귀화에는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출전을 위한 목적도 있었으나, 국적 변경 규정에 막혀 올림픽 무대를 밟지 못했다. 린샤오쥔은 선수 전성기인 23세부터 26세를 통으로 날렸다.
린샤오쥔과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는 특정 목소리에 휘둘리기보다, 체육계 차원의 신중한 조사가 필수적이다. 빙상경기연맹과 체육회는 충분한 검토 없이 린샤오쥔에게 성급한 징계를 내렸고, 한 선수의 운명을 뒤바꿨다. 이제는 임효준이 아닌 린샤오쥔만 남았다. 고소인의 말뿐이 아니라 다각도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다시는 린샤오쥔과 같은 사례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