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이 되자 천안 병천 주민들은 일제하 숨죽여 살던 때를 벗어나 가족과 이웃들의 죽음을 애도할 수 있었다. 1947년 11월 아우내운동기념비를 세우고, 영화 제작과 유 열사 전기 출판 등을 도왔다. 살아남은 독립지사들이 이를 반겼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그들은 우리나라가 해방은 됐지만 완전 독립을 이루지는 못했다고 여겼다. 북은 소련이, 남은 미국이 점령했고 또 남쪽은 좌우가 대립해 싸우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벗어나려면 1919년의 3·1운동 정신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양반과 평민, 남과 북, 좌우 구분 없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28년 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면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47년 3월 3·1운동 기념식을 별도로 열었던 좌우익이 서울 한복판에서 몽둥이 싸움을 벌였다. 서너명이 죽고 여러 명이 다쳤다. 7월에는 여운형이 지금의 대학로 부근서 암살됐다. 좌우합작운동을 펴던 그가 살해된 것이다.
11월 중순 유엔은 총선 실시를 위한 남북한 조사 때문에 임시위원단을 파견하겠다고 결정했다. 한반도 분단 위기는 더욱 심각한 단계로 치닫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1월 27일 천안 병천에서 아우내만세운동기념비 제막식이 열렸다. 조그만 시골 마을에 1만여 명이 운집했다.
기념비는 일제 황국신민서사탑을 ‘재활용’했다. 비문을 갈아버리고 그 위에 아우내만세운동 사실을 기록했다. 비문은 정인보가 지었고, 글씨는 당시 26세 서예가 김충현이 한글로 썼다. 주민들은 이 비석을 전승비로 여겼고 “선열들도 통쾌해 하리라” 생각했다.

기념비 설립 취지문은 이랬다. “해방이 되면 즉시 독립이 될 줄 알았는데 희망은 수포로 돌아갔다 ··· 미소 양대국의 이데올로기는 우리 민족의 사상을 양분시키고 말았다 ··· 민족사상을 고취하려면 3·1정신으로 전민족이 귀일(歸一)하여야 할 것이다. 이 3·1정신을 환기하려면 그 당시 가장 포악한 희생을 당한 이 고장의 사적을 널리 전민족에 알리여 우리는 우리민족끼리 단결하여야 국가의 독립이 있고, 민족의 자유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함이다.” 이곳 만세운동 실상을 전국에 알려 민족이 단결하는 기회로 삼고자 한 것이다.
제막식에 많은 독립지사들이 추도문을 보냈다. 내용은 거의 같았다. ‘1. 완전독립을 이루지 못해 선열들께 죄송스럽다 2. 내 남은 인생은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바치겠다 3. 선열들이여 도와주소서!’ 였다.
김구는 “우리는 조국의 완전 자주독립을 달성하도록 분투노력하여 민족에 죄되고 부끄럼이 없도록 ··· 이 날을 기하여 맹세한다”고 말했다. 한훈은 “해방 3년이 되는 금일, 국토는 양분된 그대로 사상은 혼란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진 이 착잡한 현상이 어찌 선열들의 피 흘려 순국하신 독립정신이며 끼치신 뜻이리요. 송구스럽고 죄스러우며 또한 슬픈 마음 그지없는 것입니다”라고 적었다. 한훈은 친일 직산군수를 처단하고, 광복군 결사대를 조직해 조선총독을 암살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유 열사는 이후 80년 동안 온국민의 마음 속에 나라 사랑과 국민 통합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
지금 대한민국은 12·3계엄 사태와 윤석열 대통령 탄핵 등을 둘러싸고, 많은 국민들이 두 편으로 갈라 서있다. 해방 후 이렇게 국민들이 나뉘어 대립한 적이 있었던가. 이재명 대표 2심 선고, 윤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를 거친 후에는 국민 갈등이 어디까지 치달을까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보수·진보 진영 정치인들은 이런 상황을 걱정하기보다 국가권력 장악에 이용하려는 듯하다.
해방 정국에서 독립지사들은 좌우대결 상황 극복을 위해 유 열사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기념사업회에 참여했고 선양사업에도 동참했다. 지금의 대한민국 상황은 어떤 우리 역사 인물을 끌어내야 도움이 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