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문화]
준표 도령한텐 미안하지만 사랑이라는 게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니잖니? 막히면 돌아가라고, 모로 가도 서울로 가라는 거지" "누나, 그 치미가 좀 긴 거 아냐? 좀 더 짧게 섹시하게∼." "잔디야, 입술이 너무
말랐다. 이렇게 침 좀 발라."(KBS 2TV 월화드라마 '꽃보다 남자' 8회 방영분 중)
지금 당장 우리 교빈이 안 만나겠다고 혈서라도 쓰란 말이야." "뭐야? 아니 무슨 개뼉다구 같은 사랑 타령이야. 그럼 나더러 쪽팔리게 며느리 세번 봐라 그거야? 이런 싸가지 없는 계집애 같으니."(SBS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71회 방영분 중)
요즘 최고의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 드라마의 장면들이다. '꽃보다 남자'에서는 부잣집 아들과 데이트 하러 나가는 잔디에게 부모는 물론 어린 남동생까지 나서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며 치마를 섹시하게 입고, 입술에 침도 바르고, 향수도 진하게 뿌리고 나가라고 안달을 한다. 돈의 노예와도 같은 서민 일가족의 모습은 한없이 비굴하다. 그런데도 이들 가족의 말투나 표정에서 그 어떤 비애나 굴욕감도 찾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당당하고 떳떳할 뿐이다.
'아내의 유혹'은 타락과 패륜, 불륜으로 점철돼 있다. 주인공들의 독기 어린 표정과 고성으로 얼룩진 막말이 매회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들 드라마의 시청률은 30∼40%를 기록하고 있다.
지금 한국사회에 이른바 '막장 드라마'가 판을 치고 있다. 막장 드라마는 '막장 인생'이라는 표현을 응용한 것이다. 막장이 갱도의 막다른 곳을 의미하는 단어인 데서 쉽게 알 수 있듯 막장 드라마는 '갈 데 까지 간 드라마'를 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다 높은 시청률, 보다 많은 이윤획득의 포로가 된 제작자들은 일말의 성찰 없이 상식과 합리성, 가치와 도덕개념을 포기한 줄거리 및 연출을 이어가고 있다. 시청자는 시청자대로 갈 데 까지 간 드라마 내용에 열광하며 무비판적으로 즐길 뿐이다.
막장 드라마는 사회 구성원들의 말초적 본능을 부추기며 물신주의와 외모지상주의를 극단적으로 조장하고 사회 비판의식을 마취시킨다. TV의 막대한 파급력으로 왜곡된 가치관을 지속적으로 주입당한 사회는 결국 부지불식간에 속으로 깊이 곯아 들어갈 수밖에 없다. 방송매체의 영향력은 워낙 강력해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관 및 라이프스타일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커뮤니케이션학의 상식에 속한다. 드라마의 쾌락적 기능을 인정하더라도 요즘 막장 드라마는 해도 너무한다는 게 비판적인 언론학자들의 일치된 시각이다.
드라마 평론가인 윤석진 충남대 교수(국문과)는 "'꽃보다 남자'는 막장 드라마로 부르는 것조차 관대한 평가라고 할 만큼 사회적 폐해가 큰 드라마"라며 "드라마는 본래 허구이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요즘 막장 드라마를 보니 폐해가 진짜 심각해 생각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시청자들은 현실 감각이 점점 무뎌지고, 더욱 자극적이며 말초적인 소재에 집중하게 된다. 이 같은 악순환이 반복된다"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방송사와 제작자들은 흔히 "다수 시청자의 의사를 반영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와 마찬가지"라며 "시청자들의 판단력과 수준을 얕잡아 보면 안된다"고 이른바 '문화적 민주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언론학자들은 문화적 민주주의를 대단히 교묘한 기만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TV시장에선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즉 시청자들에겐 오로지 방송사의 일방적인 '공급'에 대해 '수요'의 양을 결정할 수 있는 여지가 허용될 뿐, 시청자들의 바람(want)이나 필요(need)가 프로그램의 방향을 결정하는 경우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수용자들은 능동적인 면도 분명 갖고 있지만, 그걸 지나치게 강조하는 건 폭포수 밑에서 우산을 쓰고 있다고 자위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TV 속의 세상과는 크게 다르다. 당연히 현실 세계와 TV 세계 사이에 심각한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왜곡된 이데올로기에 지속적으로 세뇌당한 시청자들은 현실의 모순을 망각하고 허위의식을 키워가면서 결국 주체성을 상실한 채 삶의 현장에서 스스로 소외된다. 시장논리에 함몰된 대중문화는 사회 구성원들의 '정치로부터의 도피'와 무관심을 부추기며 자신을 둘러싼 부당한 환경을 정당화시키는 아편과 같은 작용을 한다. 드라마 생산자들의 사회적 책임감과 수용자들의 문제의식이 절실한 이유다.
문화비판 분야의 가장 중요한 저작 중 하나로 꼽히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공저 '계몽의 변증법'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대중 매체가 단순히 '장사(business)'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아예 한 술 더 떠 그들이 고의로 만들어낸 허섭스레기들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사용된다." 발간 당시보다 지금의 시대를 해석하는 데 훨씬 더 유효하다는 평가를 받는 대목이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호경 기자
hk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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