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사회] 하얀 도화지에 푸른색의 큰 나무가 들어섰다. 수영장과 집도 그렸다. 예쁘게 그린 그림은 14세 소녀의 작품다웠다. 아이는 그림을 다 그린 뒤 친구들과 장난을 치며 환하게 웃었다. 얼굴 표정이나 몸짓 어디에도 그늘진 구석은 없었다.
그러나 그림 속 나무에는 탐스런 열매 대신 황금과 다이아몬드, 지폐가 매달려 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어색할 정도로 좁고 길었다.
그림을 그린 칭팡루이는 부모를 여의었다. 지난해 5월12일 중국 쓰촨성 대지진 때 모두 숨졌다. 가슴 속에 묻어둔 아픔은 평상시에는 표출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슬픔과 충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미술치료사들은 칭팡루이의 그림을 보고 “관심을 원한다. 황금과 다이아몬드는 주목을 받고 싶어하는 속마음”이라고 설명했다. 집으로 가는 멀고 좁은 길은 부모가 없는 집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고스란히 담겼다고 했다.
지진이 덮쳤을 당시 칭팡루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수업 도중 강한 진동을 느꼈다. 교실은 심하게 흔들렸고 굉음이 쉴 새 없이 들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하던 부모가 숨졌다는 비보를 들었다. 외할머니와 지낸다는 칭팡루이는 구김살 없는 모습을 보이다 부모 얘기가 나오자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쓰촨성 대지진으로 피해를 입었던 아이 16명이 12일 한국을 찾았다. 밝은사회클럽 국제본부(GCS)에서 마련한 ‘미술치료를 통한 밝은 세상 그리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 위해서다. 아이들은 경기도 용인시 경희대학교 국제캠퍼스에 짐을 풀었다. 18일까지 이어질 치료 과정은 대구대학교 미술치료연구소 치료사들이 맡았다.
13일 실시된 첫 수업은 아이들과 교감을 나누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그림도 부담 없이 자유주제로 정했다. 아이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는 그림 속에 그대로 나타났다. 학교 지붕이 무너져 12시간 동안 교실에 갇혀 있었던 왕이페이(10)는 ‘사람들이 나를 구하러 오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당시의 두려움을 여전히 기억했다.
치료사들의 걱정은 14일부터 시작할 프로그램이다. 아이들이 가슴 속 깊이 묻어둔 상처를 직접 건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권재희 미술치료사는 “사람은 아픈 기억을 피해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그림의 주제를 ‘지진하면 떠오르는 것’ ‘지진 때 소중한 사람을 잃었던 감정’ 등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픔을 알게 되면 그 다음에는 그림으로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행복했던 경험을 그리면서 아픈 기억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려주고, 밝은 인생을 설계하도록 도와준다. 행사의 산파역할을 한 홍순영 미술치료사는 “아이들의 아픔은 평생 갈지 모른다. 꾸준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용인=국민일보 쿠키뉴스 서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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