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불법행위 규명돼도 국가상대 손해배상은 먼길

국가 불법행위 규명돼도 국가상대 손해배상은 먼길

기사승인 2009-09-22 17:28:02

[쿠키 사회] 일제 강점기부터 군부통치 시절까지 국가가 자행한 각종 불법행위가 최근 속속 규명되고 있지만 정작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배상은 쉽게 이뤄지지 않고 있다. 수십년간 씌워졌던 억울한 누명이 벗겨졌는데도 피해자들은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사법 절차를 통해 그동안의 피해를 배상받을 수 있는 길을 원천 봉쇄당하고 있다.

◇국가 상대 손배소는 모두 패소=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가 일제 강점기 이후 국가 불법행위로 규정한 사건은 모두 74건이다. 이 가운데 피해자 유족들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사건은 1949년 문경 학살 사건과 50년 울산보도연맹사건, 나주 학살 사건 등 3건이다.

하지만 올들어 법원 판결이 이뤄진 이들 3건은 모두 유족들이 패소했다. 문경 및 나주 사건은 1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려졌고, 울산 사건의 경우 1심은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했지만 지난달 열린 2심에선 선고 결과가 뒤집어졌다. 1심 재판부는 국가에 의해 이뤄진 불법행위라는 사실이 2007년 진실위 규명 결과로 입증됐다며 유족들 손을 들어줬으나 항소심은 소멸시효가 끝나기 전에 유족들의 권리 행사가 어려울 이유가 없었다며 패소 판결을 내린 것이다.

◇소멸시효의 덫=이처럼 법원이 불법행위를 인정하면서도 국가에 배상 책임을 지우지 않는 이유는 소멸시효 조항 때문이다. 소멸시효란 권리를 가진 사람이 일정기간이 지나도록 권리를 행사하지 않을 경우 그 권리가 없어지는 제도다. 민법 제766조에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사건 발생일로부터 10년, 또는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이 지나면 사라진다고 규정돼 있다. 이 때문에 사건 발생 수십년이 지난 현재 피해자들이 법적으로 피해를 배상받을 기회를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법원은 납북어부 서창덕씨 간첩조작 의혹 사건과 민족일보 조용수 사건 등에 대한 당시 법원의 판결이 잘못됐다며 진실위가 최근 재심을 권고한 사건들에 대해서만 무죄 판결을 내린 뒤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하는 추세다. 그러나 재심 요건이 되지 않는 대다수 사건은 국가 배상 책임 판결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풀이되고 있다.

◇특별법 제정 필요성=이런 탓에 진실위의 각종 의혹 규명 이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인 다른 사건들의 피해자와 유족 사이에선 아예 소송을 포기하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피학살자 유족회 관계자는 22일 “여러 사건 피해자 유족들이 최근 잇따른 패소로 소송을 망설이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일각에선 유족들의 피해 보상을 위해선 국가권력에 의한 불법행위 만큼은 소멸시효를 인정하지 않는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이 현실적인 방법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진실위 관계자는 “불행을 겪은 국민을 구제하고 기본권을 보장하도록 법을 만드는 것은 국가의 의무”라며 “국가 배상책임 이행을 위해 일률적 피해구제를 명시하는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선정수 기자
jsun@kmib.co.kr
남혁상 기자
jsun@kmib.co.kr
남혁상 기자
이 기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 추천해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추천기사
많이 본 기사
오피니언
실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