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스포츠] “굳이 가야겠다면 절대 차에서 내리지 마세요.”
남아공월드컵 출장을 떠나기 전 아프리카 여행사 직원은 저를 붙잡고 신신 당부했습니다. 중심도시 요하네스버그에서 가장 악명 높은 빈민가 알렉산드라(Alexandra)에 직접 가보겠다는 계획 때문이었죠. 여행사 직원만이 아니라 가족과 친구, 심지어 회사까지 저의 계획을 되물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뒤 만난 타사 기자들마저 “살아서 돌아오라”고 농반 진반의 인사를 할 정도였답니다. 5분만 걸어도 강도를 당하고 외국인을 죽여 시체를 불태우는 최악의 빈민가라는 악명은 그렇게 저의 계획을 ‘무모한 도전’으로 만들고 있었습니다.
여행수칙 위반1. 차에서 내렸다
18일(이하 현지시간) 남아공 거주 한국인 가이드의 차량으로 알락산드라에 들어갔습니다. 출장을 떠나기 전 ‘괜찮다’며 한껏 허세를 부려놓고도 막상 차에서 내리려니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 없더군요. 그렇게 저의 위대한 첫 걸음이 내딛어지고 있었습니다.
한낮인데도 길거리 곳곳에는 흑인 남성들이 무리를 지어 앉아 있었고 허름한 판잣집 대문에는 나름대로 꽃단장한 여성들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대로 지어진 건물도, 반듯한 식당도 없는 이곳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리에서 아무나 붙잡고 이야기하는 것뿐이었죠.
흙과 자갈이 깔린 운동장에서 바람 빠진 축구공을 굴리는 어린이와 접시가 없어 커다란 플라스틱 쟁반에 음식을 담아주는 식당의 주인, 저 같은 이방인을 위해 자전거 묘기를 준비했다는 청년, 이윤 없이 지역축구팀을 만들어 청소년을 마약과 음주에서 구해낸 코치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판매와 구걸에는 강요가 없었고 시선을 마주칠 때마다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워 안녕을 물어줬습니다. 해가 질 무렵까지 6시간 동안 이곳에서 발견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떠날 때쯤 한 가지 사라진 게 있었죠. 서구 언론들이 심어준 흑인 빈민에 대한 오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여행수칙 위반2. 차에 탔다
한국이 아르헨티나에 졌던 지난 17일 밤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한국 측 기자단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단독 체류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남아공에 도착한 뒤 일주일 내내 무리 지어 다니다 홀로 남게 되니 약간의 두려움도 있었지만 저에게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죠.
국제축구연맹(FIFA)은 전 세계에서 몰려온 언론인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경기장 미디어센터에서 호텔까지 미디어 전용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타면 숙소까지 안전하게 돌아갈 수 있죠. 오후 11시45분인 막차를 탈 계획이었는데 버스는 자정을 넘겨도 오지 않았습니다.
이곳은 겨울입니다. 한 밤에는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답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내내 아내가 그렇게 가져가라던 점퍼를 챙기지 않은 것을 후회했죠. 그때였습니다. 버스 승강장에서 정차 중이던 15인승 승합차의 창문이 열리더니 한 흑인이 ‘호텔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하더군요.
추운 날씨 탓에 솔깃하기는 했으나 출장 전부터 ‘흑인 차량은 물론, 밤에는 택시도 믿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한 밤 중 흑인의 승합차를 탄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저에게 FIFA 허가증을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월드컵 자원봉사자들이었습니다.
괜히 의심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미친척하고 체험해보자’는 생각으로 차 안에 들어갔습니다. 승합차에는 운전자를 포함해 총 4명의 흑인이 있었고 바닥에는 술병이 굴러다녔습니다. 다행히 운전자는 음주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커시티 스타디움에서 호텔까지 이동하는 30분 내내 ‘어디서 왔나’ ‘결혼했나’ ‘한국은 어떤 곳인가’를 저에게 물었습니다. 아마도 제가 의심하거나 긴장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겠죠.
약간의 대화를 나누다보니 조금은 안심이 돼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동영상(아래 동영상 참조)을 찍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담고 싶었죠. 사진을 찍으려다 어두운 탓에 아무 것도 담을 수 없었고 동영상을 통해 소리라도 확실히 기록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플레시를 터뜨리자니 왠지 그들의 심기를 긁어 강도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30분이 흘렀고 저는 호텔 앞에서 안전하게 내렸습니다. ‘살았다’는 생각이 들 때 쯤 운전자가 저에게 한 마디 했습니다. “당신을 안전하게 데려다줘 기쁘다.” 모든 오해가 부끄러움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요하네스버그(남아공)=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자쿠미(Zakumi)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의 공식 마스코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