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으로 따낸 금메달. 시상대에서 사이먼은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미소 뒤에는 불법체류자, 가난, 외톨박이 같은 어린 시절의 꼬리표들을 떠올리는 스무 살 꽃다운 청년 사이먼의 복잡한 생각이 숨어있다.
한국명은 조성문. 서울에서 스케이트를 배운 사이먼은 네 살 때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 정상적인 이민은 아니었다. 불법체류자로 발을 딛은 미국땅에서 그에겐 ‘어메리칸드림’을 꿈꾸기에 너무나 혹독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사이먼이 잠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일하러 나가, 그가 잠든 뒤 밤늦게 귀가했다. 조그만 테이크아웃 초밥식당에서 일하던 부모는 늘 돈이 없어 쪼들렸고, 불법체류자 신세 때문에 자동차 운전면허조차 가질 수 없었다.
수도와 전기가 끊겼던 적도 있었고 집은 월세 아파트였다. 한푼 두푼 번 돈을 차곡차곡 저축하던 부모는 사이먼이 초등학교 2~3학년때쯤 자신들만의 가게를 차릴 수 있었다.
항상 일해야하는 부모, 같이 있고 싶었지만 그런 엄마 아빠를 이해할 수 밖에 없었던 사이먼은 얼음위를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스케이트가 너무 좋았다. 빨리, 아주 빠르게, 이 모든 힘든 고난이 자신과 가족을 스쳐지나가길 바라는 마음이었나보다.
아들 사이먼이 스케이트에 남다른 재능을 보이자, 부모는 또 깊은 고민에 빠졌다. 잘 해준 것도 없는 아들 뒷바라지를 하려면 가게를 팔아야 하고 그럼 또 생활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부모는 결단을 내렸다. 가게를 팔고 날씨가 따뜻해 겨울철에만 스케이트를 탈 수 있던 메릴랜드주 말보로에서 미국의 북서쪽 끝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로 이사했다. 저축해놓았던 4만 달러를 고스란히 아들의 쇼트트랙 훈련비용에 썼다.
1996년 불법 입국한지 7년 만인 지난 2004년 이들 가족은 미국 영주권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사이먼은 쇼트트랙 선수로 승승장구해 2006년 15살의 나이로 미국 대표선수가 됐다. 그러나 곧바로 시련이 닥쳐왔다. 국가대표 2년차 슬럼프. 쇼트트랙 대표팀 선발전에서 탈락하며 고난이 시작됐다.
국가대표 자격을 잃은 탓에 미국올림픽위원회(USOC)의 지원금이 끊어졌고, 때마침 찾아온 세계적 금융위기로 아버지의 사업까지 기울었다. 잠시 쇼트트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2010년 밴쿠버 동계올림픽을 앞둔 2009년 9월 남자 500m 결승에서 아폴로 안톤 오노(32)를 제치고 1위로 골인하며 국가대표로 다시 선발됐다. 장권옥(44) 러시아대표팀 감독 등 한국인 지도자들의 전폭적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이먼은 2008년 캐나다 밴쿠버 동계올림픽 남자 5000m 계주에서 동메달을 차지하며 미국 빙상 스타로 자리 잡았다. 당시 한국대표팀(은메달)과 같은 시상대에 오른 탓에 조국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월드컵 금메달. 그의 진짜 ‘어메리칸 드림’은 이제 시작됐다. 토박인 미국인들에게 불법체류자란 말은 ‘불량인간’을 뜻한다. 텍사스와 애리조나 쪽 국경을 넘어 무작정 미국으로 들어온 멕시칸과 히스패닉 불법체류자들 대다수가 미국 사회의 외곽지대에서 범죄와 마약에 빠지기 때문이다.
사이먼은 이 같은 미국인들의 인식을 편견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었다. 새로운 기회를 찾아 온 힘을 다해 일한 이민자 부모와 그런 부모의 희생과 스스로의 의지를 일어난 미국인이어서다. 그런 의미에서 그에겐 ‘파이오니어(pioneer·개척자)’가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