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일본으로 건너와 미야기(宮城)현 센다이(仙臺)시 미야기노(宮城野)구 가모(蒲生) 마을에서 대형 트레일러를 운전하며 생활하던 김씨는 지난 11일 밀어닥친 쓰나미에 아내 마유카 구지(35)씨를 잃었다. 집은 해변에서 1㎞ 정도 떨어져 있다.
김씨는 11일 당시 평소처럼 오후 근무 준비를 하던 중 도호쿠(東北) 지방에 사상 최악의 지진이 발생했다. 김씨는 오후 2시46분 태어나 처음으로 세상이 뒤틀리는 것 같은 느낌을 경험했다. 김씨는 곧바로 집 근처 커튼 공장에서 일하는 아내에게 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다급히 피난소가 마련된 나카노(中野) 소학교를 찾았고, 그곳에서 아내를 만날 수 있었다. 애타게 찾은 지 1시간 만이었다. 학교 정문에서 김씨를 알아본 아내는 크게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아내의 뒤엔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높이 10m의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 해안가 집들이 차례차례 거대 파도에 묻혔고 차량은 파도에 들려 건물 2∼3층 높이로 떠밀려 왔다.
“쓰나미다. 뛰어!” 김씨는 아내에게 소리쳤다. 그제야 뒤를 돌아본 김씨의 아내는 달려와 김씨의 손을 잡았다. 김씨 부부는 그렇게 10m를 뛰어 체육관 앞에 도착했지만 순간 파도가 두 사람을 덮쳤다. 본능적으로 아내를 껴안았지만 깨어났을 땐 혼자였다. 아내의 손을 잡고 뛴 10m가 김씨에겐 아내와의 마지막 기억이 됐다.
파도는 김씨 머리 위 8∼9m 정도 높이의 체육관 천장까지 차올랐다. TV, 나무더미, 타이어 등 온갖 물건이 김씨 머리를 내리 눌렀다. 해병대 763기로 97년 연평도 해병부대에서 만기 제대한 김씨는 일단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수면 위로 헤엄쳐 올라갔다. 목재에 박힌 쇠못들이 김씨의 손과 얼굴, 다리 등을 사정없이 찌르고 긁었지만 헤엄을 멈출 수 없었다. 물을 가득 머금은 오리털 점퍼와 장화도 물속에서 벗어야 했다. 간신히 2층 난간에 설치된 농구대가 김씨의 손에 닿아 움켜잡았다. 함께 대피한 10여명 중 김씨 혼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2층 난간에 오른 김씨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세찬 눈보라였다. 일본 동북지방을 초토화시킨 쓰나미는 눈까지 동반했다. 한기가 밀려왔다. 닥치는 대로 커튼을 뜯어 몸에 두른 채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체육관 바닥이 보이기까지 2시간이 걸렸다.
체육관 바닥은 처참했다. 쓰레기더미로 변한 체육관에서 시체 3∼4구가 보였지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맨발이 된 김씨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아내의 시신을 찾으며 집까지 걸어갔다. 길바닥에 널브러진 못과 유리조각이 김씨의 발바닥에 박혔지만 통증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35년 상환 계약으로 3000만엔을 대출받아 지난해 구입한 김씨의 집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내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차가운 체육관 바닥에서 생을 마감했을 거라고 생각됐다.
이날 아침 해변에서 멀리 떨어진 유치원과 보육원에 보낸 일곱 살 딸 미래와 한 살 쌍둥이 성현·성령이는 무사했다. 다음날 유치원 교사는 김씨에게 “지진 발생 후 연락이 두절되자 이와테(岩手)현 구지(久慈)시에 살고 있는 장인과 장모가 340㎞를 자동차로 달려와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고 전했다. 김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지만 이와테현 역시 통신이 두절돼 15일까지도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김씨는 “한 살배기 쌍둥이는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을 수 있지만 큰딸 미래에게는 엄마를 잃은 슬픔이 평생 상처가 될 것 같아 걱정된다”며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그는 “현지 복구가 빠르면 2년, 늦으면 5년이 걸릴 텐데 한국에 돌아가 일을 구해야 할지, 여기서 직장을 다시 구해야 할지 암담할 뿐”이라며 허탈해했다.
크리스천인 김씨는 신앙의 힘으로 고통을 견뎌내는 듯했다. 그는 “저를 살려 주신 건 어딘가 쓸 일이 있어서겠죠”라고 말끝을 흐렸다.
김씨는 16일 아침 해가 뜨는 대로 처가가 있는 이와테현으로 출발한다. 심하게 외상을 입어 자위대 니카다케(苦竹)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15일 센다이 총영사관으로 옮겼다. 김씨는 “아이들을 만난다는 생각에 오늘 밤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다”고 설레는 마음을 내비쳤다.
센다이=apples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