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 스포츠] 신수지(20·세종대)가 고개를 숙였다. 제92회 전국체육대회 리듬체조 심판진의 불공정 채점 의혹을 제기하고 미니홈피에 격한 표현의 글을 올려 논란이 불거지자 사흘 만인 13일 소속사 보도자료를 통해 사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사과문에서는 미세한 기온차가 느껴진다. 경기 결과를 인정하지 않고 감정적으로 행동한 점은 자책했지만 대회 운영방식과 채점 체계 등에 대한 개선을 대한체조협회에 요구했다. 이는 기존 입장에서 크게 물러나지 않은 것이다. 협회 측도 “심판 채점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되풀이하며 불씨를 남겼다.
“더러운 X들아. 그딴 식으로 살지 마”
신수지는 지난 10일 경기도 김포시 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회 리듬체조 일반부에서 최종 합계 101.225점으로 김윤희(20·세종대·101.500점)에 이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석연치 않은 점수 발표 과정과 혼란스러운 장내 분위기 탓에 격해진 감정을 추스르지 못했다.
같은 날 밤 신수지는 미니홈피에서 협회를 겨냥해 “더러운 X들아. 그딴 식으로 살지 마라. 이렇게 더럽게 굴어서 리듬체조가 발전을 못하는 거다”라고 성토했다. 다음 날 사태가 확산되자 해당 글을 삭제했지만 언론을 통해 “조작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점수였다”며 일부 심판들의 불공정 채점 의혹을 제기했다.
협회는 곧바로 “심판 채점에 문제가 없다”고 못을 박았고, 대표팀 ‘맏언니’ 신수지와 협회 사이에는 잠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신수지는 그러나 더 이상 사태를 악화시키고 싶지 않은 듯 먼저 손을 내밀었다. 소속사 세마스포츠마케팅은 당초 기자회견을 통해 입장을 밝힐 계획이었으나 이를 취소하고 13일 보도자료를 언론에 배포하며 신수지의 입장을 전했다.
협회는 신수지로부터 경위서를 받은 뒤 조사를 마치고 다음주쯤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 그러나 징계 등 극단적인 조치가 나올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협회 관계자는 “협회 차원의 입장이나 조치가 나오겠지만 그동안 신수지의 공헌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했다.
사과했지만…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
사태는 어느 정도 마무리된 듯 보이지만 논란은 당분간 계속 될 것으로 전망된다. 곳곳에 불씨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신수지는 사과문에서 불공정 채점 의혹에 대한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채점 권한이 전적으로 심판에게 있다는 점은 인정했지만 “의혹을 제기할 이유는 충분히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이번 사건을 계기로 협회의 대회 운영방식과 심판의 채점 체계를 개선할 수 있는 조치를 철저히 마련해달라”고 요구했다.
이번 경기는 그의 국내 고별전이었다. 내년 1월 프레올림픽을 통해 2012년 런던올림픽 본선 진출에 도전할 계획이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은퇴 수순을 밟을 수 있다. 밝은 모습만 보여줬던 신수지가 평소보다 거친 표현으로 불만을 드러낸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물음표가 찍힌 그의 사과문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신수지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동아시아 선수로는 처음으로 본선 자력 출전권을 획득했다. 비인기종목인 리듬체조를 대중에게 알려 후배 선수들의 앞길을 열어준 그에게는 혼란스러운 고별전 무대가 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협회도 대회 운영에 다소 문제가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불공정 채점은 없었다”는 기존 입장을 반복했다. 전국체육대회에서 각 선수들의 연고지별로 심판이 공정하게 배정됐고, 20명의 심판이 있었던 만큼 불공정 채점 있었다면 현장에서 곧바로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는 게 협회의 설명이다.
협회는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13일 기술위원회를 열어 비디오 판독을 실시했으며 심판 대부분으로부터 “불공정한 채점은 없었다”는 소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한순간에 물거품된 8년 우정…‘리듬체조 요정들’의 비극
신수지와 협회는 원만한 사태 해결 외에도 남은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8년간 신수지와 돈독한 우정을 쌓아온 김윤희(20·세종대)와 한창 주가를 올리던 유망주 손연재(17·세종고) 등 ‘리듬체조 요정’들은 이번 사태에 직·간접적으로 휘말려 상처를 입었다.
특히 김윤희의 경우 신수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국내 고별전이 될 수 있는 이번 경기에서 시상대 최상단에 오르고도 축하를 받기는커녕 난처한 입장에 놓였다. 지난 11일 새벽 트위터에 “나는 가운데에서 무슨 입장인가”라며 답답함을 토로한 그는 곧이어 “이제 그만, 우리 사이를 망가뜨리는 것 같다. 8년간 가족처럼 지냈는데 한 순간에 이렇게 되는 것(은 싫다)”이라며 서운함을 드러냈다.
김윤희는 신수지를 의식한 듯 말을 아꼈으나 ‘심판을 매수하고 채점을 조작했다’거나 ‘노력 없이 우승했다’는 일부 네티즌들의 주장까지 나오자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는 11일 자정 트위터에 “나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노력 없이 얻은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코치와 동료들은 알 것이다. 내 노력까지 비난하지 말아 달라”고 호소하며 분명한 입장을 밝혔다.
‘신수지가 더 잘했다는 점을 인정하라’는 한 네티즌의 말에 대해서는 “(나도) 올 시즌 국내·외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 1등 해도 기사 한 번 나지 않고, 축하 한 번 못 받아도 꿋꿋하게 내 갈 길을 걸어온 것뿐이다. 정말 너무한다”며 오래 억눌렀던 울분을 터뜨리기도 했다.
손연재도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여론의 불똥을 맞았다. 그는 사태 이틀 뒤인 13일 프로농구 개막전에 시구자로 나섰다가 네티즌들의 비난 여론에 휩싸였다. 대표팀 선배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손연재는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출전자로, 일반부에서 비롯된 이번 사태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지만 이번 파장은 그에게까지 상흔을 남겼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