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큼 요즘 군대가 부모들이 안심하고 맡겨도 좋을 만큼 좋아졌다는 말이다. 그는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서 근무하며 너무 힘들어 혼자 화장실에서 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1968년 북한 무장공비들의 청와대 습격기도사건으로 사회가 떠들썩할 때 이등병 생활을 시작했던 이씨는 전사자 기록카드 정리요원을 거쳐 차트병으로 일했다. 밤을 새워 가며 오전 8시까지 브리핑 차트를 만들어 놔야 했다. 그는 군 복무시절을 회상하며 “잠 안 재우는 고문은 지금도 견딜 자신이 있을 만큼 고생했다. 군대 안 갔다 왔으면 밤새 글을 써야 하는 작가라는 직업에서 낙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작가로서의 밑천을 군대에서 벌었다”는 얘기다.
이씨는 요즘도 집 근처 부대의 ‘문제병사’ 상담역을 자처하고 있다. 사나이로 태어나 국가와 민족을 위해 몸바쳤다는 게 얼마나 자긍심 있느냐고 말해주면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민을 털고 일어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와 얘기를 나눴던 병사 중에 사고를 낸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이씨는 비법을 묻자 “군인다움을 잃지 않는 게 사람다움을 잃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워 준다. 부대장들이 내가 병사한테 마약을 먹여 보낸 것 아니냐는 농담도 한다”며 웃었다. 국민일보 쿠키뉴스 최현수 군사전문기자 hscho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