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항 논설위원-그 숲길 다시 가보니] 식물들이 춤추는 곰배령길

[임항 논설위원-그 숲길 다시 가보니] 식물들이 춤추는 곰배령길

기사승인 2014-06-01 15: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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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인제 점봉산 곰배령(해발 1164m) 가는 숲길에는 봄도, 여름도 늦게 온다. 그렇지만 올해는 좀 다르다. 지난 26일 설악산 국립공원 사무소를 찾았을 때 국립공원관리공단 직원들로부터 “지금 곰배령에 꽃이 별로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봄꽃은 예년보다 일찍 졌고, 여름 꽃은 아직 안 피었다는 것이다. 기후변화의 변덕 탓에 제 철의 꽃 보기도 쉽지 않은 일이 됐다.

속초에서 하룻밤을 자고, 27일 아침 양양을 거쳐 곰배령길을 탐방하기로 했다. 2006년 개통된 조침령터널을 지나서 진동계곡을 따라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설피마을로 향했다. 양양 양수발전소가 들어선데 이어 동홍천~양양간 고속도로 공사를 하느라 곳곳이 파헤쳐지고 어수선하다. 설피마을은 겨울에 눈이 워낙 많이 내려 설피를 신고 다녀야 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이곳은 3둔5가리처럼 조선시대에 낙백한 선비들이 숨어들던 은둔처였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허름한 산간오지였지만, 지금은 거의 마을 입구까지 도로가 포장됐고, 비포장 구간도 길이 확장됐다.

기후변화로 눈개승마, 매발톱 등 여름꽃 만개

진동리 설피마을 바로 위의 곰배령 생태관리센터부터 강선마을까지 계곡을 따라 이어지는 1.7㎞의 평탄한 길은 평범한 듯 하면서도 다른 산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와 풀들이 많다. 낙엽이 수북이 쌓인 숲에서 자라는 감자난초는 조그만 황갈색 꽃들이 줄기 끝에 모여서 피어있다. 꽃봉오리가 열리면 하얀 꽃잎이 드러난다. ‘숲의 요정’이라는 꽃말에 어울리게 녹색 꽃대와 황갈색 꽃, 그리고 하얀 꽃잎술이 조화를 이룬다. 노란 나도양지꽃, 보라색 벌깨덩굴꽃, 연보라색 졸방제비꽃 등이 자주 보인다. 여름을 알리는 샛노란 꽃인 미나리아재비도 활짝 피었다.

계곡 건너편에서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인 도깨비부채를 발견했다. 도깨비부채는 큰 잎이 부채를 닮았고, 그 크기도 사람 손바닥보다 훨씬 더 커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름이 50㎝에 이르는 것도 있다고 한다. 황백색 꽃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면서 차례대로 핀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조릿대 꽃도 보였다. 꽃대가 나와서 진한 보라색 꽃받침 위로 삐죽한 노란 꽃이 고개를 내밀었다. 1년 중 이맘때 약 보름동안만 피는 꽃이다.



벌깨덩굴이 눈에 자주 띈다. 보라색 꽃이 희한한 모양인데, 한쪽 부분은 하얘서 마치 잉어가 입을 벌리고 있는 모양이다. 종자가 결실된 뒤부터는 곧게 서는 게 아니라 다른 식물을 감기 시작한다. 벌이 많이 날아들기 때문에 민가에서는 양봉을 위한 밀원식물로도 활용한다. 삿갓나물도 거미모양의 노랑색의 꽃을 피웠다. 잎이 7개 정도 되고 꽃줄기가 하나 올라와 ‘칠엽일지화’라고도 한다. 족도리풀꽃은 지고 있었다. 자줏빛 동그란 꽃 모양이 옛날 여자들이 결혼할 때 쓰던 족두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난티나무 열매, 견과류 조각처럼 탐방로 뒤덮어

나무들도 다양하다. 까치박달, 서어나무, 거제수 등 자작나무과 나무, 느릅나무, 난티나무, 다릅나무, 고로쇠나무, 피나무, 찰피나무, 호랑버들, 돌배나무, 야광나무 등이 고루 섞여 있다. 강릉과 속초, 양양의 해안가는 겨울에도 온난한 해양성 기후대를 형성하지만 설악산과 점봉산의 고산지대는 기온이 낮아 겨울철에 많은 눈이 내린다. 산림청 산하 국립수목원 조용찬 박사는 “한랭 습윤한 기후조건은 온대북부 식물과 온대중부 식물이 공존할 수 있게 만들어 종 다양성 유지를 위한 기반이 된다”고 말했다.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 정승준 계장은 “점봉산은 때죽나무와 사람주나무의 북방한계선이고 설악산은 만병초와 눈잣나무의 남방한계선”이라고 말했다.

강선마을부터 곰배령까지 3㎞ 구간은 고목들이 즐비한 본격적 극상림이다. 관중, 고사리 등 양치식물이 탐방로 주변을 뒤덮었다. 난티나무 열매의 씨앗이 바닥에 온통 널려 있다. 탐방로 뿐만 아니라 주변 풀잎 위에까지 거의 무슨 견과류 슬라이스 고명을 뿌려놓은 듯하다. 난티나무 열매는 5~6월에 가장자리가 날개로 된 길이 1.5~2㎝ 정도의 납작한 타원형 열매가 밝은 갈색으로 여문다. 가운데 위쪽에 씨앗이 들어 있으며, 다 익으면 가까운 곳으로 날아간다. 그렇지만 발아되는 씨앗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곳곳에 보이는 층층나무, 들메나무, 느릅나무, 난티나무 고목들은 20~30m 높이까지 자라 고개를 들어도 잎을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잎이 어느 나무 것인지도 헷갈렸다. 다른 산에는 흔해 빠진 신갈나무와 소나무를 오히려 드물게 나타났다.

앙증맞은 참꽃마리가 탐방로 옆에 숨어 있다. 연한 남색 꽃이 피고 두 세달에 걸쳐 피고 지기를 반복한다. 지름이 0,7㎝에 불과해 과연 나비나 벌을 불러 모을 수 있을지 의심이 들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그만 개미나 작은 곤충이 드나든다고 한다. 흰색에 가까운 덩굴꽃마리도 발견됐다. 뿌리에서 쥐의 오줌 냄새가 나는 쥐오줌풀, 검은 색 꽃봉오리가 요강처럼 생긴 요강나물 등의 꽃도 보인다. 흰 광대수염 꽃도 탐방로 내내 자주 눈에 띈다. 꽃잎 밑에 달린 꽃받침 끝이 수염처럼 뾰족하게 나와 광대의 수염을 연상시킨다. 용둥굴레는 연두빛 꽃을 막 피우려고 하는 중이었다. 독성이 있는 천남성, 잎이 미나리와 비슷하지만 꽃은 냉이를 닮은 미나리냉이, 죽을 쑤는 등 구황식물로 이용됐던 풀솜대 등의 꽃도 보였다.

늦봄까지 피어있는 야생화들이 많이 진 대신 6월에 피는 꽃들이 일찍 얼굴을 내밀었다. 눈개승마,
매발톱, 노란장대 등의 꽃들이 벌써 피었다. 눈개승마는 누워 자라는 개승마라는 뜻으로 고산지대에 서식한다. 여름 내 흰색 꽃이 부채꽃 모양으로 펼쳐진다. 동의나물과 연영초의 꽃 진 자리에는 그 꽃들과 모양이 비슷한 열매가 모습을 갖춰가고 있다. 이제 여름 꽃들인 말나리, 금강초롱투구꽃, 오리방풀, 곰취, 멸가치, 어수리 등의 꽃들도 머지 않아 진동계곡 주변을 수놓을 것이다.



곰배령은 강원도 강릉의 선자령, 정선과 태백의 분주령, 금대봉 일대 등과 함께 야생화 트레킹 3대 명소 중 하나다. 곰배령에 서식하는 보호식물은 금강초롱, 한계령풀, 모데미풀, 진부애기나리, 왜솜다리 등 30여종에 이른다. 곰배령 일대를 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한 산림청은 탐방예약제를 통해 하루 탐방객을 300명, 진동리 마을에서 내주는 탐방허가인원 300명 등 60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처음에는 100명, 몇 년 후에는 200명, 올해부터는 300명 등으로 산림청의 탐방허가 인원은 계속 늘어났다. 탐방예약을 안 한 사람들도 진동리 민박집에서 묵으면 하루 300명까지는 탐방허가가 나온다. 봄과 가을철 탐방휴식일인 월·화요일을 제외한 날에는 탐방객이 거의 상한선까지 몰린다고 한다.

지금 곰배령 탐방로 옆으로는 멧돼지들이 풀밭과 흙을 온통 파헤쳐 놓은 곳이 많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멧돼지 새끼의 생존률이 높아지는 등 개체수가 급증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수렵구역이 늘어난 반면 국립공원 구역에서는 수렵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점봉산이 인근 멧돼지들의 피난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국립공원연구원 김의경 연구원은 “멧돼지가 땅을 깊게 파헤쳐 놓은 것은 칡 등의 식물 뿌리를 먹기 위해서이고, 표토를 살짝 뒤집어 놓은 것은 곤충이나 지렁이를 잡아먹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산림과학원 오승환 박사는 “멧돼지가 좋아하는 얼레지, 금강초롱 등 특정한 식물 종은 자취를 감추는 일도 벌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멧돼지가 점봉산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멧돼지는 일시적으로 경관을 망치고 특정 식물종의 수를 줄이기는 하지만, 농부처럼 흙을 일구어 생물 다양성을 높이기도 한다. 즉 파헤쳐진 구덩이에서는 다른 지형보다 낙엽층이 더 발달해 애기앉은부채, 현호색, 오리방풀 등이 잘 발달할 가능성이 크다. 조용찬 박사는 “멧돼지의 왕성한 활동은 토양 교란을 통해 천이 초기의 조건을 형성해 점봉산 초지와 관목지를 유지하는 요인이 된다”면서 “곰배령은 결국 숲으로 진행되는 것이 자연의 바램”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멧돼지보다 사람의 과도한 발길이다.



인제읍 귀둔리로 향하는 하산 길에 잎 군데군데 흰 페인트를 칠한 듯한 개다래를 만났다. 덩굴식물인 개다래의 일부 잎은 잎면의 절반이나 전부가 흰 색으로 물들어 멀리서 보면 마치 하얀 꽃이 핀 것처럼 보인다. 이는 벌이나 나비를 유혹하기 위한 것으로 수분이 이뤄지면 다시 초록색으로 돌아간다. 나름대로 치열하게 짜낸 번식의 전략인 셈이다. 산딸나무의 작은 꽃이 눈길을 끌기 위해 커다란 넉 장의 포(苞)를 달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산딸나무는 아주 작은 꽃들이 축구공처럼 둥그렇게 모여 있지만, 꽃차례 지름이 1㎝도 안 된다. 이를 둘러싼 십자가 모양의 예쁜 연두색 포는 언뜻 보면 꽃잎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곤충을 불러 모으려는 장치다. 식물들은 동물처럼 이동할 수는 없지만, 그 때문에 생존과 번식의 전략은 동물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다양하다.

임항 논설위원 hnglim@kmib.co.kr

임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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