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보스토크, 극동 러시아를 걷다

블라디보스토크, 극동 러시아를 걷다

기사승인 2014-08-25 04:50:55

왕복 10㎞ 루스키섬 트레킹… APEC 개최 후 달라진 블라디보스토크, 아시아 속 유럽 풍경에 감탄 절로

“여기 사람들은 미소가 야박해!”블라디보스토크 시내를 거닐던 일행 중 한명이 무심코 한마디 내뱉었다. 모두들 그 말에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각자 “공산주의 사회의 영향을 받아서 그렇다”느니 “물가가 비싸서 그런 것 같다”느니 하며 맞장구쳤다. 이후 나는 ‘러시아 사람들은 잘 웃지 않는다’는 게 참말인지 확인하려고 현지인들을 계속 살폈다.

며칠 뒤 한국으로 떠나는 날, 그동안 일행을 여기저기로 데려다 준 현지인 운전기사에게 “스빠시바(고맙습니다)”라고 작별인사를 건넸다. 그런데 기사는 의외의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는 게 아닌가! 놀란 건 당연했고 얼음왕국 같았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차가운 이미지가 한방에 녹아내렸다.

지난달 13일부터 17일까지 4박5일 일정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했다. 동해항국제여객터미널에서 배(DBS 크루즈훼리)를 타고 하루 꼬박 동해를 가로질렀다. 일정은 시내 관광과 루스키섬 트레킹 코스 답사였다. 가이드는 서태원 일본여행닷컴 대표와 이예원 밀라투어 블라디보스토크 지사장, 선우성씨가 맡았다.


블라디보스토크는 러시아 극동 최대도시이자 연해주의 중심도시다. ‘동방을 지배하라’라는 뜻의 지명답게 동해 연안 최대 항구가 자리 잡고 있고 여행자들의 로망인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또 곳곳에 발해의 유적과 연해주 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신한촌 터가 위치해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올해는 러시아지역 한인 이주 150주년이 되는 해라 의미를 더했다.




20여 년 전만 해도 블라디보스토크는 군사도시라는 이유로 외국인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러나 2012년 이곳에서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총회가 열린 이후부터 외국인 방문객들에 대한 입국수속 절차를 대폭 줄였고, 최근엔 우리나라와 무비자협정까지 체결했다. 덕분에 우리도 손쉽게 항구를 빠져나와 시내로 나올 수 있었다.

최근 러시아는 극동 러시아 개발 프로젝트를 가동 중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사회적 인프라 확충도 이에 속해 도시를 재단장 하는 데 자그마치 210억 달러가 투자됐다고 한다.

여기서 7년째 생활하고 있는 선우성씨에 말대로 시내는 깨끗했다. APEC 회담 개최의 영향으로 총회가 열리기 4~5년 전부터 블라디보스토크는 도시개조를 위한 공사를 시작했고 지난해까지만 해도 시내 전체가 공사장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가장 큰 변화는 금각만(金角灣) 일대에서 일어났다. 총회가 열린 루스키섬과 시내를 연결하는 길이 3100m의 대형 연륙교가 이곳에 생긴 후 원래 빈민촌이었던 다리 주변에 오페라하우스, 하얏트 호텔 같은 번쩍번쩍한 건물들이 생겼다. 뿐만 아니라 인근 빌딩들은 노랑색, 분홍색의 페인트가 칠해져 도시 분위기가 한층 밝게 업그레이드 됐다.


루스키섬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도 선씨의 설명은 계속됐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적이 있어요. 이 금각만 대교 설립에 그는 무진장 공을 들였는데, 당시 그의 눈에 공사가 지지부진했었나 봐요. 대통령이 다녀간 이후 시장이 바뀌기까지 했죠. 그리고 도시 중심부를 조금 벗어나면 시내와 완전 딴판으로 아직까지 어수선합니다. 여기 현지인들은 투자된 돈이 어디로 흘러갔느냐며 불평불만이 많아요. 관료 부패가 여전히 심각하다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답니다.”

항구에서 루스키섬 트레킹코스까지는 원래 배를 타고 약 2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나 우리는 이날 루스키섬까지 놓인 다리를 넘어 단 30분 만에 도착했다. 트레킹코스는 해안을 따라 나 있었고 풀숲 사이로 난 좁다란 길을 걷는 이들은 우리가 유일했다. 현지인들은 주로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주변에 휴양지임을 알리는 안내판 같은 표시는 전혀 없었고 대신 현지인들이 탄 차량이 무수히 들락거렸다.

루스키섬은 그동안 군사 요새로 쓰였다. 지금은 여기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전부 철수하고 군시설물들도 모두 철거됐다. 걷는 내내 격납고 같이 생긴 인공동굴 등이 자주 눈에 띄었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아 자연환경이 비교적 깨끗하게 보존돼 있다고 하는데 야생동물 등은 볼 수 없었다.



우리가 섬을 방문했을 때 현지 기온은 섭씨 30도를 웃돌았다. 서울보다 위도가 높아 시원할 줄 알았다는 게 일행의 반응이었다. 섬 주변 해안가에서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는 현지인들도 보였지만 실제 숙박을 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선씨는 이들을 가리키며 “치안 상태가 좋지 않아 밤이 되면 철수한다”고 설명했다.

루스키섬 트레킹은 4시간 정도 걸렸다. 한국과 식생이 비슷해 마치 제주도에 있는 올레길을 걷는 듯했다. 최근 블라디보스토크 대한민국 총영사관에서 이 트레킹코스에 관심을 많이 보인다고 하는데 머지않아 이곳에도 일본의 ‘규슈올레’처럼 또 다른 올레길이 생길지 두고 볼 일이다.

동해안의 해안도로를 연결하는 도보코스 ‘해파랑길’개척을 벌여온 윤문기 (사)한국의 길과 문화 상임이사는 “코스가 어렵지 않을 뿐만 아니라 풍광이 아름다워 걷기 코스로 제격”이라며 “루스키섬의 트레킹 코스를 훗날 해파랑길과 연결시키면 의미 있는 도보코스가 완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아직 워터파크나 야영장 같은 위락시설 등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일정 중 시내 인근에 위치한 ‘쉬코토바’라는 지역의 한 스키장에 들렀는데 야영장으로 써도 매력적인 공간이었음에도 여름에 이곳을 방문하는 현지인들은 아무도 없었다.

선우성씨는 현지에서 변호사로 일하며 종종 가이드일로 ‘투잡’을 하고 있었다. 현지인들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두 개 이상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는 시내에 인접한 작은 원룸의 한 달 임대료가 80만원 정도 된다고 덧붙였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우리나라와 가장 가까운 유럽으로 불린다. 1860년쯤부터 도시 건설이 시작돼 역사가 비록 150년 정도로 짧은 편이지만 그런대로 이국적이어서 붙은 별칭이다.

러시아 혁명, 군사시설물, 신한촌 같은 유적들이 시내 한 곳에 몰려 있는 것이 특징인데 모두 걸어서 돌아볼 만 했다. 좀처럼 웃지 않는 현지인들의 표정도 이색적인 볼거리 중 하나였다. 러시아 TV에서 방영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코미디언들이 ‘몸개그’를 펼칠 때 박장대소하는 현지인들이 많다고 한다.

2004년 5월 서태지가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에 위치한 ‘디나모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펼친 적이 있다.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러시아에서 가진 이 콘서트에 현지인들 1만 여명이 몰렸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는 한국 가수의 공연에 그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건 서태지가 음악과 춤에 굶주려 있던 현지 젊은이들의 마음을 후련하게 달래줬기 때문이라는 평이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에 그제야 활짝 웃어 보인 운전기사 또한 타인에게서 받는 친절이나 호의가 고팠던 건 아니었을까?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보니 분명 이곳도 곧 낭만과 활기가 넘치는 도시로 변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들었다.

윤성중 기자 sjy@kukimedia.co.kr
sjy@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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