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人터뷰] 이병헌 감독 “10년 만에 내놓은 ‘스물’ 내 새끼 같죠”

[쿠키人터뷰] 이병헌 감독 “10년 만에 내놓은 ‘스물’ 내 새끼 같죠”

기사승인 2015-03-29 15:56:55
사진=박효상 기자

[쿠키뉴스=권남영 기자] 이병헌(35) 감독에게 ‘스물’은 “내 새끼”같은 영화란다. 처음 연출한 상업영화라서? 그게 다는 아니다. 영화의 ‘ㅇ’자도 모르던 그가 처음 쓴 시나리오였다. 지금은 ‘글빨’로 충무로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그에게 1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스물’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최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 감독은 ‘스물’과 닮은 구석이 많았다. 세련된 유머와 재치는 기본. ‘말맛’이 일품인 영화처럼 그의 대답 한 마디 한 마디엔 리듬감이 살아있었다. 겸손과 패기 사이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입담엔 센스가 넘쳤다.

앞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다소 긴장한 듯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그땐 왜 그랬냐고 묻자 이 감독은 “시사회 때 영화를 보고 약간 무거운 마음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때 처음으로 ‘이 영화가 잘 안 될 수도 있겠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무방비상태로 듣다 웃음이 터졌다. 자신감 가득한 이 말과 달리 이유는 겸손하기 그지없었다.

“거의 완성된 상태로 극장에서 본 건 처음이었어요. 배급관에서 봤는데 아무래도 일반 관객 분들보단 웃음소리가 적었죠. 그러면서 영화에 좀 부족하거나 실수한 지점들도 보이기 시작하고…. 머릿속에 무거운 생각들이 왔다갔다하는 상태로 기자간담회에 바로 갔더니 자꾸 다른 생각이 들더라고요.”


딱 부모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애정을 쏟은 만큼 괜스레 불안한 마음이 컸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스물’은 초고를 쓴지 10년 만에 운명적으로 재회한 작품이다. 첫 장편 연출작 ‘힘내세요 병헌씨’(2013)을 눈여겨 본 제작사 대표 제안으로 다시 품에 돌아왔다. 이 감독은 더 나은 시나리오를 완성하기 위해 수없이 고치고 다듬었다.

“초고와 완성본 내용이 많이 달라요. 세 남자 녀석들 이야기라는 것 빼곤 다 다른 것 같아요. 처음엔 스무살이 아니라 20대 얘기였어요. 그 때 왜 투자가 안됐는지 지금 보니 알겠더라고요. 산만한 부분들이 있었고 기획적인 포인트도 약했던 것 같아요. 연출 의뢰를 받고는 딱 스무살을 생각했어요. 서른 중반이 되니 아련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제 또래 이상 사람들에겐 추억처럼 느껴질 수 있겠다 싶었어요.”

영화는 고3 때 같은 반이었던 세 친구 치호(김우빈), 동우(이준호), 경재(강하늘)가 ‘스물’이 되면서 겪는 성장통을 코믹하게 그린 작품이다. 이성에만 관심이 많은 ‘잉여’ 백수 치호, 생활고로 일찍 철든 재수생 동우, 대기업 입사를 꿈꾸는 모범생 경재. 캐릭터 묘사가 어찌나 실감나는지 실제 주변에 꼭 한 명씩들 있을법하다. 각 캐릭터 색깔은 역시 ‘대사 맛’으로 살아났다.

‘과속 스캔들’(2008) ‘써니’(2011) ‘타짜-신의 손’(2014) 등을 각색한 이 감독의 진가가 발휘된 순간이다. 그는 “물량 공세가 없는 영화였기에 대사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며 “속도, 타이밍, 호흡을 모두 철저히 계산해서 썼다”고 설명했다. 대사를 주고받는 리듬이 깨지면 안 된다는 게 그의 철칙이었단다. ‘말맛의 달인’ 수식어는 그냥 얻어진 게 아니었다.


하지만 연출은 이제 막 첫 발을 내딛은 단계다. 영화를 찍으면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힘들었다”고 그는 토로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 감독은 “스태프들이나 배우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많이 배운 것 같다”며 얘기를 이어갔다.

“전에는 독립영화를 했으니까 어떻게 보면 철저하게 제 방식대로 움직였던 것 같아요. 콘티를 현장에서 바로 짜서 하기도 했고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콘티라는 게 스태프들과의 약속이라는 것에 대해 좀 더 깨닫게 됐어요. 힘들었다기보다는 ‘알았어, 배웠어’ 그런 느낌이에요. 물론 지금도 시행착오를 겪고 있는 중이지만(웃음).”

시작이 빠른 건 아니었다. 남들처럼 정석 코스를 밟지도 않았다. 고3 때까지 마땅한 꿈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던 이 감독은 고등학교 졸업도 하기 전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스물’에 나오는 동우처럼 ‘만화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잠깐 했으나 이마저 일찌감치 접었다. 지금 돌아보면 “무모하고 미친 것 같다” 싶지만 당시엔 군대말고 다른 선택이 없었다. 문제는 제대 후에도 아무런 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었다.

“영화를 하기 전까지는 진짜 딱 동우 같기도 하고, 치호 같기도 하고. 그냥 술이나 먹었죠 뭐. 고민을 하긴 했어요. 근데 왜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없었는지…. 뭘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영화 ‘스물’에서 보여주는 그런 고민들을 거의 그대로 안은 채 몇 년 동안 살았던 것 같아요.”


대학에서 국제통상학을 전공했지만 이 역시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운명처럼 찾아왔다.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집에서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인터넷을 하다 우연히 찾아본 영화 시나리오가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다.

“원래 영화에 관심 있어서 그런지 눈이 가더라고요. 너무 재밌었어요. 막 뒤적뒤적해서 몇 개를 더 찾아봤어요. ‘시나리오를 읽는 게 더 재밌네?’ 이런 생각이 드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긴 했는데 왜 직접 할 생각은 못했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부터 이 감독은 시나리오 공모전에 눈을 돌렸다. ‘나도 쓸 수 있겠는데?’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혹시 상금을 받으면 술값으로 쓸 요량이었다. 그렇게 무작정 써낸 시나리오가 영화사에 덥석 팔렸다. 더구나 ‘스물’ ‘네버엔딩 스토리’(2012) 초고가 연달아 러브콜을 받았다. ‘나 천재인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때 그는 잠시 착각에 빠졌단다.

“천재 맞는 것 같다”는 기자의 말에 이 감독은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며 웃었다. 그는 “영화에 점점 재미를 느끼고 필드에서 일하게 되면서 습작을 어마어마하게 했다”며 “1년에 3~4편씩 썼다”고 설명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걸 찾지 못했던 한? 쌓였던 울분? 모두 거기에 다 쏟은 것 같아요. 그게 시작이었죠.”


“뭔가에 잘 빠지지 않는” 그가 영화라는 것에 처음 빠졌다. 알면 알수록 재밌었다. 뒤늦게 시작했다는 조바심에 하루 몇 편씩 몰아봤다. 큰 도움이 되지 않을지 몰라도 ‘일찍 시작한 사람들만큼은 봐야하지 않느냐’는 생각이었다. 영화를 보고 글 쓰는 일을 매일 반복했다. 이 감독은 “그때 ‘나도 뭔가에 빠지는 구나’ 싶었다”며 “열정 아닌 열정이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원래 철저하게 계획 세우는 이런 타입이 아닌데 그땐 계획을 세웠어요. 영화를 시작한다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거든요. 그 선택을 한 다음엔 스스로 시간을 줬어요. ‘4년 해보자.’ 4년제 대학 다니는 셈치고 그 안에 엔딩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자는 생각을 했어요. 각색으로 올라갔으니까 어쨌든 반 성공했네요(웃음).”

연출의 길로 들어서며 세운 계획도 순조롭게 이뤄지고 있다. 이 감독은 “계획대로 돼서 저도 좀 당황스럽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에도 “바쁜 게 좋다”는 그는 “마흔 살까지는 쉬지 않고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지한 내용에도 역시 장난기를 잃지 않은 답변에 인터뷰는 웃음으로 마무리 됐다.

“서른 살 때 그 생각을 했거든요. ‘되든 안 되든 마흔 살까지는 해보자. 쉬지도 말자.’ 어쨌든 작가로는 잘 팔리니까 쉬지는 않을 거라고(웃음) 생각했죠. 근데 이 나이가 되니까 ‘10년은 너무 길었다’ 싶더라고요. 이쯤 되면 체력이 떨어지는 걸 계산 못한 거죠. 5년 단위로 할 걸. 하하. 아무튼 뒤에 준비하고 있던 것만 잘 풀리면 절대 못 쉴 것 같아요.” kwonny@kmib.co.kr
권남영 기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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