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은 지난 1월 21일 노환으로 중앙대병원에 입원했다가 한 달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빈소는 서울 아산병원이며 장지는 경기도 안성 천주교 추모공원이다. 발인은 23일 오전 8시다.
김 고문은 우리나라가 태극기를 들고 처음 참가한 1948년 런던 올림픽 남자역도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내며 한국 올림픽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는 전쟁 중이던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며 빛나는 역사를 만들었다.
김 고문은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첫 연속 대회 메달리스트였다. 그의 일생은 치열했던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 고문은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며 체육인의 삶을 시작했다.
한국에 역도를 보급한 서상천 선생과의 만남이 운명을 바꿨다. 김성집 고문은 서상천 선생의 '현대 체력증진법'을 읽고 역도를 동경했고, 서 선생이 운영하던 중앙체육연구소에 발을 들였다.
역도 입문 2년 만인, 1935년 제6회 전조선 역기대회 중체급에서 정상에 오르며 전국에 이름을 알렸다. 이어 1936년 베를린올림픽 조선 예선에 나서 합계 317.5㎏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조선 대표로 전일본 역기선수권대회에 나선 김성집 고문은 다시 317.5㎏을 들어 챔피언이 됐다.
그러나 일본역도연맹은 “김성집이 만 18세가 되지 않았다”며 올림픽 출전을 불허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 치하를 벗어나면서 이런 설움은 사라졌다. 휘문중학교에서 역도부 후배를 가르치던 김성집 고문은 다시 훈련을 시작했고 올림픽 출전을 꿈꿨다.
김 고문은 1948년 런던 올림픽 역도 대표팀 선발전에서 미들급 합계 385㎏으로 우승했고 마침내 올림픽행 티켓을 손에 넣었다.
서울을 떠나 런던까지 20일이 걸리는 고된 여정에도 김 고문은 지치지 않았다. 미들급에 나선 김 고문은 합계 380㎏을 기록했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선수가 따낸 올림픽 첫 메달이었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부산으로 내려간 김 고문은 1952년 헬싱키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훈련을 이어갔다. 전쟁 중에도 한국은 헬싱키 대회에 나섰고, 김 고문은 감독 겸 선수로 75㎏급 경기에 나섰다.
김 고문은 합계 382.5㎏으로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올림픽 역사상 첫 연속 대회 메달리스트가 탄생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5위를 기록한 김 고문은 이후 행정가로 한국 스포츠에 기여했다.
1960년 대한체육회 이사가 된 그는 이후 체육회 사무총장, 태릉선수촌장, 체육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한국 스포츠 행정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고인은 13년 7개월 동안 태릉선수촌장을 역임해 역대 최장수 선수촌장이다.
선인원 전 태릉선수촌 부촌장은 “워낙 과묵한 분이셨는데 후배 지도자들에게 말로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라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에 그만큼 후배들이 더 그분의 말씀을 무겁게 받들 수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yes228@kukimed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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