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민수미 기자] 철에 맞지 않은 옷차림의 한 어린아이가 슈퍼마켓 문 앞을 서성거린다. 고민을 거듭하다 가게에 들어온 아이는 배고픔에 떨리는 손으로 과자를 집기 시작했다. 몸은 조그만 과자 상자 하나 들기도 힘에 부치는 듯 야위어 있었다.
슈퍼마켓 주인은 아이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따르릉. “경찰서죠?”
꿰어져가는 구슬처럼 줄줄이 드러나는 대한민국 아동학대의 충격적인 민낯. 그 시작은 한 시민의 신고전화에서 비롯됐다.
지난해 12월. 인천 연수구에서 게임에 빠진 아버지와 그의 동거녀가 초등학생 딸을 2년여 간 집에 감금하고 학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밝혀졌다. 당시 11세의 나이에 상습적인 폭행과 방임에 노출돼 있던 A양은 자신의 손에 묶여있던 노끈을 풀고 맨발과 반바지 차림으로 가스 배관을 타고 탈출했다. A양이 향한 곳은 집 근처 슈퍼마켓이었다.
A양의 탈출 시도는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앞선 시도에서 A양은 그를 발견한 행인에 의해 다시 집으로 가야 했다.
천신만고 끝에 A양에게 자유와 따뜻한 보살핌을 안겨준 건 결국 한 통의 신고 전화였다. 이로 인해 정부 차원의 조사가 실시됐고 부천 초등생 시신 훼손 사건, 부천 여중생 미라 시신 사건, 이른바 ‘원영이 사건’으로 알려진 평택 아동 암매장 살인사건 등 아동을 상대로 한 강력 범죄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건 발생 4개월여가 지난 최근, A양의 상황을 경찰에 알렸던 슈퍼마켓 주인 이모(42·여)씨를 다시 만났다. 그는 “자신의 신고 전화로 인해 많은 사건이 드러나게 될 줄은 몰랐다”며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쑥스럽게 웃었다.
다음은 이씨와의 일문일답.
-A양을 목격했던 당시 상황을 기억하나
“아이와 처음 마주친 건 창고로 가는 길목이었다. 그때는 아이에게 신발이 없는 걸 눈치 못 챘다. 그저 ‘추운데 왜 반바지를 입고 있지?’ ‘너무 말랐다. 어디 아픈가?’ ‘장애인 시설에 있는 아이인가?’하는 여러 가지 생각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아이가 가게에 들어온 후 과자 판매대에 섰다. 원하는 과자를 꺼내려고 두 손을 뻗쳤는데 기운이 없는지 휘청거렸다.
수척했던 충격적인 모습과 달리 의사 표현을 분명히 했던 기억이 난다. 도와주려고 했더니 ‘본인이 할 수 있다’고 말하더라. 나를 신경 쓰여 하는 것 같아서 자리를 비켜주기도 했다.
아이가 과자를 다 고르고 밖으로 가지고 나가려 해서 팔로 아이를 감싸고 “그렇게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도움이 필요한 아이 같아서 파출소에 신고한 거다. 그랬더니 아이가 대뜸 한다는 소리가 “너무 배가 고파서 그랬어요. 너무 추워요”였다.
따뜻한 음료와 히터를 틀어주고 이것저것 물었더니 “보육원에서 나를 때리고 굶겼다”고 대답했다. 그때 자세히 보니 아이 몸에 멍 자국들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보통 부모를 불러 돈을 받고 끝내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일단 아이가 학대받은 것처럼 보였다. 정황 상 아이가 너무 말라 있었고 어디서 뛰쳐나온 것 같았다. 한마디로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나는 일반적으로 동네 아이가 우리 가게에서 물건을 훔치게 되면 일단 그냥 가도록 내버려둔다. 동네 사람들이기 때문에 부모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모가 슈퍼에 왔을 때 CCTV를 보여주고 이야기를 하는 편이다.
부모도 아이의 실수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물론 우리 아이도 그런 적 있고 부모들도 놀라겠지만, 이걸 계기로 ‘이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개념을 심어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럼 부모들은 아이를 훈육하고 다시 데리고 와서 사과하고 물건값을 변상해준다. 나는 그때 아이에게 ‘다음엔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는 정도다.”
-신고를 했다. ‘남의 가정사인데 내가 개입해도 되나’라는 생각도 들었나
“그런 생각은 안 했다. 그렇다고 내가 오지랖이 있는 사람은 아닌데…. 신고도 그 아이가 도움이 필요해 보였기 때문이지 물건을 훔쳐서 한 것은 아니다.
또 신고했다는 행동 자체를 칭찬해 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게 큰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다. 어른들이 해야 할 일들을 안 해서 사회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사건이 알려지기 전, A양을 학대했던 부모와 동거녀 등과 마주친 적 있나
“우리 가게 단골손님이었다. 그냥 봤을 땐 보통사람들과 다르지 않았다. 평범했다. 물건에 트집을 잡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먹을 것을 많이 사가고 한번 오면 5만원, 10만원 씩 구매하는 편이었다. 동네 슈퍼 입장에서는 큰 손님이었다.
주로 고기. 과일. 애견 간식을 많이 사 갔다. 그 사람들은 완제품보다 직접 해먹을 수 있는 고기 재료, 예를 들면 돼지갈비, 양념 갈비, 감자탕 거리 등을 자주 샀다. 그런데 나중에 그들이 피골이 상접했던 A양의 부모라 하니까 처음에는 믿기지 않더라.
가게에 오면 날씨 등 일상적인 얘기들도 자주 했다. A양에 대한 이야기는 ‘딸이 한 명 있다’가 전부였다. 그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얘기를 잘했다. 강아지를 아주 예뻐하던 기억이 난다.”
-본인의 신고가 많은 아동학대 사건을 세상에 알리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일단 너무 놀랐다. A양 사건 이후로 자고 일어나면 또 사건이 일어났다. 학대의 강도도 입에 담지 못할 정도 아닌가. 이렇게 많은 아이가 고통 받고 있었다고 하니 착잡하더라.
솔직히 이건 내가 한 일이 아니라 A양이 한 일이다. 아이가 대단하다. 걔가 정말 영웅이다.
부모의 지속적 학대에 저항할 수 있는 아이들은 많지 않다. 그런 교육을 나라에서 시켜야 하는데 안 하지 않나. 부모는 무조건 공경해야 하고 효도해야 한다고만 했지, 부모가 너를 학대했을 때 어떻게 대응하라고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런 아이가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가 아니라 주종관계에서 탈피해 살려고 도망쳤다. 대단하다.
어쨌든 많은 사건이 드러나게 돼서 다행이다. 이로 인해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나 학대 아동에 관한 제도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나라를 이끌어갈 아이들 아닌가. 이런 아이들이 상처받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삐뚤어지게 자라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밝고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 주는 것이 어른과 부모들의 할 일이기도 하고.”
mi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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