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손예진이 청순가련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대중들은 손예진의 미모를 극찬했고, 그녀를 보기 위해 스크린과 브라운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손예진은 외모가 아닌 연기력으로 승부해야 하는 배우가 됐다.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 선보인 광기어린 연기는 그녀를 다시 한 번 뛰어난 배우로 자리 잡을 수 있게 하는 좋은 기회다. 지난 16일 서울 삼청로 한 카페에서 만난 손예진은 ‘비밀은 없다’ 출연을 결심한 계기로 연기에 대한 갈증을 꼽았다.
“전형적인 연기를 계속하다보면 스스로 지겨울 때가 있거든요. 특히 연기나 캐릭터를 만들고 접근하는 방식이 익숙해지죠. 그 익숙함을 극복하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 그런데 ‘비밀은 없다’의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모든 게 새로웠어요. 아이를 잃은 엄마라는 소재는 많았지만 그 속에서 연홍이 내뱉는 대사와 행동이 독특하고 재밌었어요. 이해되지 않으면서도 이해되는 모호한 매력도 있었고요. 스릴러 장르는 이미 해봤지만 이런 색깔의 영화는 처음이에요. 스스로를 연기적으로 한 번쯤 깨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아요.”
손예진이 로맨스나 멜로 같은 달콤한 장르와 멀어진 지는 이미 오래 됐다. 최근 5년간 공포 코미디 영화 ‘오싹한 연애’, 재난 영화 ‘타워’, 스릴러 영화 ‘공범’, 모험 액션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까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해왔다. 오는 8월 개봉하는 ‘덕혜옹주’에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사극까지 도전했다. 손예진은 그 순간 가장 하고 싶은 시나리오를 선택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나씩 밟아가다 보니 어느 순간 필모그래피가 그렇게 됐어요. 15년간 연기하면서 그 때 당시에 들어온 시나리오 중 가장 하고 싶은 걸 택했어요. 흥미롭고 재밌고 하고 싶은 작품을 선택하게 되죠. 제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영화를 다 찍고 난 후에 정리해서 설명하곤 하지만, 사실은 정말 즉흥적이에요. 그 당시에 제가 꽂힌 영화나 이건 뭔가 다를 것 같다는 이유가 많았죠. 2000년대 초반에는 주로 멜로가 많았는데 요즘에는 그런 영화가 별로 없어요. 시대 흐름 덕분에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더 커진 것 같아요.”
손예진은 ‘비밀은 없다’에 등장하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고 털어놨다. 15년간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이번 영화를 통해 발견한 것이다. 연기하는 과정조차 새로웠다는 손예진의 낯선 모습을 이끌어낸 건 이경미 감독의 디렉팅이었다.
“제가 생각해서 준비한 연홍의 감정과 대사 톤이 있었지만 감독님의 시선은 달랐어요. 감독님이 원하는 연홍의 모습이 뚜렷하게 있었죠. 예를 들어 제가 ‘우리 딸이 사라졌다’는 대사를 걱정스러운 톤으로 한다면, 감독님은 톤을 높여서 소리 지르는 식으로 하길 원했어요. 그 장면 외에도 곳곳에서 다른 느낌의 표현을 원하셨어요. 그런데 감독님과 계속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접점이 맞을 때가 있었죠. 기존에 봐왔던 고정관념을 자꾸 깨니까 재밌었어요.”
고정관념을 깨며 새로운 연기에 도전했기 때문일까. ‘비밀은 없다’ 예고편이 공개됐을 때부터 손예진의 연기에 대한 호평이 등장했다. 시사회가 끝난 이후에는 이 영화로 여우주연상을 받는 것 아니냐는 얘기까지 나왔다. 이 얘기에 손예진은 환하게 웃으며 좋아했지만, 욕심내지는 않는다고 선을 그었다.
“상은 진짜 너무 기분 좋은 것 같아요. 예를 들면 학교에서 시험을 봤는데 0점을 맞고 비가 오고 우산도 없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집에 갔더니 엄마가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있는 느낌이죠. 나 자신에게 ‘고생했어’라고 하는 하나의 보상인 거죠. 처음에 연기를 꿈꾸며 연기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여우주연상 받는 게 꿈이었어요. 하지만 하면 할수록 절대 마음대로 안 되더라고요. 욕심내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괜히 실망하잖아요. 하하.”
‘비밀은 없다’는 그저 무서운 스릴러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영화를 본 관객들의 호불호는 확연하게 갈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손예진은 ‘비밀은 없다’를 볼 관객들을 위한 메시지를 남겼다. 다양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새롭고 특별한 영화라는 얘기였다.
“‘비밀이 없다’는 다양한 얘기를 하고 있는 영화예요. 무서운 이야기도 있지만, 가족의 이야기도 있고 그 안에 서로의 알력을 다투는 정치 이야기도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 가장 가깝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낯선 모습에 대해 각자의 시각에서 서로 다른 공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우리 영화를 보면서 감동의 눈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까지 보지 않았던 장면이나 음악이 새로운 느낌을 전해주는 특별한 영화로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비밀은 없다’는 국회 입성을 노리는 신예 정치인 종찬(김주혁)과 그의 아내 연홍(손예진)이 선거를 보름 앞두고 실종된 딸의 흔적을 쫓기 시작하면서 충격적 진실과 마주하게 되는 영화다. 23일 개봉. 청소년 관람불가.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