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드리고, 오리고, 구부리고, 붙이고, 깁고 굽이굽이 물결치는 알루미늄의 축제 서양화가 유휴열

두드리고, 오리고, 구부리고, 붙이고, 깁고 굽이굽이 물결치는 알루미늄의 축제 서양화가 유휴열

기사승인 2016-06-27 10:59:14

신중선(소설가)

유휴열, 그의 그림 앞에 선 나는 지금, 나 자신이 참으로 작게 느껴진다. 그만큼이나 작품이 압도적이다. 두드리고, 구부리고, 붙이고, 용접하고, 꿰매어 이어 붙인 알루미늄 판들은 물고기가 되어 떠있기도 하고 꽃으로 환히 피어나기도 하며 또한 어느 사이 나비가 되어 훨훨 날거나 푸드덕 홰치는 수탉이 되어 있다. 유휴열이 이어붙인 알루미늄 판 안에는 세상이 다 들어있다. 산과 들과 물이 있고 별과 달, 부엉이도 있고, 물고기와 갑각류도 있다. 당연히 인간도 들어있다. 말하자면 삼라만상이 함께 어울려 난장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림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자, 그럼, 우리 이제부터 걸 지게 한판 놀아볼까?”

이리저리 이어붙인
알루미늄 판 안의 세상사

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색채에서는 원시미술의 향취가 물씬 난다. 어디가 물이고, 뭍이며 또 어느 곳이 산인지 구분 짓지 않고 온갖 생물이 어울려서 벌이는 질펀한 축제. 딱히 평면회화랄 수도, 조각이랄 수도 없는, 경계가 불분명한 유휴열의 작품이 그렇게 인간과 동식물 따로 구분 짓지 않고 한데 어우러져 펼쳐져 있다. 예컨대 나는 축제에 초대된 사람인 것이고, 그것들은 나와 함께 놀자고 한다. 나, 기꺼이 그들과 어울리기를 자처한다. 그래 한바탕 놀아보는 거다.

나는 소설가로,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책상에 앉아있는 사람이지만 그림을 보는 일은 내게 특별한 일에 속하지 않는다. 그림을 찾아보는 건 내게 글 쓰는 일만큼이나 일상이 된 지 오래란 얘기다. 특히나 이쪽 평창동 방면으로 이사 오고부터는 그러한 일이 더욱 쉬워졌는데, 이유는 작은 동네치고 갤러리가 여럿 있는 편이고 인사동 나들이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소설가나 화가나 자기 세계를 확고히 구축하기까지는 지난한 노력이 필요하다. 남들만큼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지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르겠다. 혹시 대단한 천재라면 단기간에 가능할 수도 있으려나. 그렇다면 그것은 예외로 치자. 나는 유휴열의 그림을 보자마자 이 작가가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해 얼마나 치열하게 작업해 왔는가를 대번에 알아차렸다. 어떤 작가에게서도 유휴열과 비슷한 작품을 본 적이 없다. 이 말은 곧 그가 실험정신이 투철한 작가란 얘기와 일맥상통한다. 그는 확실히 독보적이고 독창적이다. 그래서 나는 유휴열을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올려놓길 주저하지 않겠다.

치열한 예술혼이 아니라면 만들어낼 수 없는 독보적인 작품

유휴열, 그는 전북 전주 모악산 아래에서 작업하고 있다. 모악산은 과거 한때 수십 개의 신흥 유사종교가 성행하던 곳이다. 지금이야 모두 정비되어 없지만 그 터의 성격이 그렇다. 유휴열의 그림에서 원시미술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건 그런 이유 또한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한번 붓을 잡으면 모든 걸 작파하고 될 때까지 작업에 매달린다는데, 그럴 때 모악산 온갖 신들도 내려와 함께 거들지 않을까.

유휴열을 뛰어난 작가로 우뚝 서게 한 것은 당연히 그의 치열한 예술혼 때문일 터이지만 그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도 한몫을 차지한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것은 알루미늄 판을 이용하는 작업이다. 알루미늄 주름관을 잘라 내거나 오리거나 구부려서 나무합판 위에 일일이 붙여서 형태를 만든 다음 그 위에 아크릴이나 유화, 자동차 도료를 이용해 채색을 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의 작업실은 여느 화가들의 그것과는 분위기 자체가 다를 것이다. 노동 현장처럼 보이지 않을까. 쇠붙이를 자르고 이어 붙이고 깁자면 대체 어떤 기계들이 필요한 것일까. 이렇듯 유휴열은 다른 회화작가들과는 달리 중노동을 통해 작품을 탄생시킨다.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기 위해 흘렸을 무수한 땀방울들! 내, 그 현장을 직접 보지 않아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가 흘린 땀이 엄청났을 거란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겠다.

원시미술의 투박함과 현대미술의 모더니즘이 함께 공존

유휴열의 작품에서는 호방함과 동시에 말할 수 없이 섬세한 손길도 함께 느낄 수 있다. 대체 어느 솜씨 좋은 아낙이 이 작가만큼 꼼꼼하게 바느질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알루미늄 판에다 말이다.

오방색을 이용하여 화려한 색채를 구사한 작품에선 원시미술이 갖는 낙천적인 즐거움과 투박함이, 은빛 알루미늄을 있는 그대로 살려서 만들어낸 모노크롬 형식의 작품에서는 차가운 재질이 주는 도도함과 고급스러움이 있다. 모노크롬 작품의 경우, 이들 알루미늄 조각은 왼쪽에서 볼 때와 오른쪽에서 볼 때 혹은 정면에서 볼 때, 저마다 색이 다르게 보인다. 빛의 굴절 때문이다. 유휴열은 물론 이러한 빛의 현상 역시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굽이굽이 물결치는 은빛 능선이랑 이리저리 얽히고설켜서 조화를 이루는 곡선, 일일이 자르고 이어서 기운 후 은은한 빛깔로 채색한다거나 세모꼴 또는 네모반듯하게 자른 후 이어붙인 알루미늄 조각판들, 이 모든 것들에서 나는 불길같이 뜨거웠을 작가의 예술혼을 읽었다.

토속적인 것과 현대적인 모더니즘이 함께 들어있는 유휴열의 작품은 거대하고 웅장하다. 처음 그의 그림 앞에 섰을 때 나 자신이 작게 느껴진 건 이 때문이다.

구상과 비구상이 공존하는 유휴열의 작품은 한 마디로 규정짓기 힘들다. 아, 그러고 싶지 않다. 틀 안에 가두고 싶지 않다. 그저 즐기고 싶고, 함께 놀고 싶을 뿐이다. 그렇다. 그의 작품을 놀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미술관은 놀이터라고 해볼까? 하늘과 땅 사이에서 인간과 동식물이 함께 뒤섞여 축제를 벌이고 있고, 그 놀이의 현장에 우리네 삶의 희로애락이 다 들어있는, 그리고 그 그림 사이 어딘가에 나 또한 한 자리 깔고 앉아있을 것만 같은.
조규봉 기자 ckb@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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