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인 심리학] ‘기다리라’는 말은 또 다른 ‘세월호’다

[이슈 인 심리학] ‘기다리라’는 말은 또 다른 ‘세월호’다

기사승인 2017-01-24 16:20:35
22일 오전 6시28분 서울 지하철 2호선 열차에서 화재가 발생해 승객 100여 명이 대피했다. 소방당국에 따르면, 서울메트로 소속 2026호 열차가 2호선 잠실역을 출발해 잠실새내역(옛 신천역) 플랫폼으로 진입하던 도중 멈춰 섰다. 그러나 긴급 상황에도 불구하고 기관사의 지시를 받은 차장은 승객들을 향해 ‘대피방법’이 아닌 “전동차 안에서 기다리라”는 안내 방송을 반복했다.

승객들은 창문 밖에서 나는 연기를 보고 직접 비상콕크 레버를 돌려 열차 문을 열었다. 차량 뒤쪽 탑승객들은 연기를 직접 보지 못해 탈출이 늦어지기도 했다. 서울메트로는 사고 발생 3분 뒤 “열차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즉시 출입문을 열고 대피하기 바란다”는 안내 방송을 내보냈다. 

서울메트로와 박원순 서울시장은 사고 경위가 정확히 밝혀지기 전에는 열차 내에 있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한다. 즉, ‘대피’보다는 ‘대기’가 옳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발생한 화재는 다르다. 연기가 전동차 내부로 들어오는 상황이었다. 승객들은 질식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대기와 대피 혹은 기다림과 탈출의 문제를 떠나, 승객들은 왜 안내 방송을 무시했을까. 
‘단어 연상(word association)’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특정의 자극단어(stimulus word)를 들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은 보통 제시된 단어로부터 의미적 연관성에 의해 또 다른 단어를 연상하게 된다. ‘기차’라는 단어를 들으면 ‘여행’이 연결되어 떠오르는 이치다. 이번 지하철 사고도 마찬가지다. 승객들은 ‘단어 연상 현상’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 ‘기다려라’ 혹은 ‘대기하라’의 단어들은 ‘죽음’과 연결되어 연상 작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3년 전 ‘세월호 참사’와 2003년 ‘대구 지하철 참사’의 학습 때문이다. 국민에게 ‘기다리라’는 말은 곧 죽음이라는 뜻의 자극단어가 된 것이다. 

국가와 지도층에 대한 ‘스티그마 효과(stigma effect)’도 발현됐을 것이다. 스티그마 효과는 1960년대 미국의 사회학자였던 하워드 베커 교수가 주장한 ‘낙인이론(labelling theory)’과 같다. 낙인이론은 한 번 범죄를 저지른 사람에게 낙인이 찍히면 결국 스스로가 ‘범죄자’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재범을 저지를 가능성이 높다는 이론이다. 대형재난 당시 빈번했던 정부의 초기대응 부재는 국민으로 하여금 낙인효과를 불러일으켰다. 인명사고에 있어 신속한 초기대응을 경험하지 못한 국민의 마음에는 이미 불신이 가득하다.

대한민국 국민은 ‘개인 트라우마’를 넘어 ‘집단 트라우마’의 상태에 도달했다. 트라우마는 보통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한다. 국민은 세월호나 대구 지하철 참사 당시 ‘갇혀있는’ 상태의 이미지를 장기기억에 담아 두고 있다. 이러한 기억이 비슷한 시각적 이미지를 직면하게 되면 불안을 야기하고, 사람은 불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드러낸다. ‘기다리라’는 방송을 무시하고 승객들이 직접 비상콕크 레버를 돌려 열차 문을 열고 나온 것은 ‘방어기제’ 중 ‘부정(denial)’에 속한다. 승객들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온전히 인지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다. 

1958년 독일 정신병리학자인 클라우스 콘라트는 ‘아포페니아(apophenia)’라는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포페니아는 서로 무관한 현상들 사이에 연관성을 추출하려는 인식 작용을 말한다. 대구 지하철, 세월호 참사 모두 이번 지하철 사건과는 연관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모든 사건에 같은 의미를 담고 질서를 찾아내 ‘죽음’이라는 개념을 부여했다. 국민이 어떤 위기 매뉴얼 방송도 믿지 못하게 된 이유가 여기 있다.

이재연(국제문화대학원대학교 상담사회교육전공 교수)

민수미 기자
min@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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