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상주=김희정 기자] 경북 상주에서 전통 도예의 맥을 잇고 있는 고윤길 도예가. 조선관요가 두 곳이나 있던 도예의 본고장 상주 땅에 흙을 사랑하는 그가 태어난 것은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
상주 시내를 벗어나 그의 작업장인 ‘상주요’로 가는 길은 한적한 시골길이다. 내서면의 평화로운 풍경을 따라가면 상주요가 나온다. 도자기와 들풀이 어우러진 작은 마당을 가로질러 한지를 바른 문을 열고 들어가면 고윤길 작가의 작품들이 아기자기하게 진열돼 있다.
한지 문살 사이로 햇살이 비쳐들면 번잡함도 욕심도 한순간에 사라지고 고요함에 젖어든다. 그가 찻잔에 차(茶)를 따르는 소리만 마음에 차오른다.
◆ 흙을 알게 된 행운아
찻잔과 다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생활도자기와 항아리, 대형접시 등 진열된 작품들 중 홍차다기세트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뽀얀 몸체에 금으로 새긴 훈민정음이 은은하게 빛나는 작품이다. 그는 세계인이 즐기는 홍차다기에 우리의 것을 아로새겼다.
훈민정음의 사상은 모두가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글을 만드는 것이다. 이는 고윤길 작가의 도자기에 대한 생각과도 일맥상통한다.
“도자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편리하게 사용했으면 합니다. 예술적인 작품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도자기의 대중화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써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글처럼 사람들에게 가까워지는 도자기 세상을 꿈꾼다.
그와 도자기의 인연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제대한 후, 지인의 소개로 인천의 한 도자기 공장을 찾아갔다.
물레 위에서 빚어지는 도자기의 자태에 한눈에 반했고, 그는 다음 날부터 바로 출근했다. 흙을 나르며 청소까지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고, 흙 만지는 일에 빠져들었다.
“저는 흙을 알게 된 행운아 입니다. 흙을 만질 때가 가장 행복해요. 흙을 빚고 있으면 시간가는 줄 모르죠. 사흘 밤낮을 물레를 돌린 적도 있어요. 다시 태어나도 흙을 만질 겁니다.”
그렇게 인천에서 백자를 익혔고, 김해로 가서 분청사기를 배웠다. 다시 경기도 여주, 이천에서 청자를 익히고 난 뒤 1998년 고향인 상주로 돌아와 그만의 도자기를 빚고 있다.
◆ 위대한 상주도자기의 후예
고향 상주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특별하다. 2006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모든 개인전은 상주에서 열었다. 내후년 도예입문 30주년 특별기획전도 상주에서 열 계획이다.
“상주에서 연구한 것들을 상주에서 보여주는 거지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주는 예부터 도자기를 생산하던 대규모 도예촌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보면 당시 4개의 조선관요 중에 2개가 상주에 있었다. 상주의 흙이 그만큼 좋다는 증거다.
그는 위대한 상주의 흙을 알리기 위해 상주 18개 면의 흙을 채취해 연구했고, 그만의 작품을 구워냈다. 1m가 넘는 대형 도예작품을 탄생시킨 것도 상주 흙의 힘이다. 가공된 흙은 입자가 둥글고 서로 잡아주는 힘이 약해 처짐이 생긴다.
하지만 상주의 흙은 입자의 모양이 다양해 서로 잡아주는 힘이 강하다. 이 때문에 높은 온도의 불길 속에서 몇 미터의 대작을 구워내도 버텨낸다.
그의 연구와 실험은 흙에 그치지 않았다. 개발한 유약 종류만 해도 60가지가 넘는다. 새로운 흙과 유약에 대한 연구는 지루하고 힘든 것이 아니라 설레고 신나는 일이다.
“새로운 흙과 유약으로 빚은 도자기는 어떻게 구워졌고, 어떤 빛깔을 낼지 생각하면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새로운 시도를 한 뒤 가마가 열리면 놀랄 만큼 아름다운 작품과 마주하게 된다. 환상적인 밤하늘도 나오고, 눈부신 설경이 담긴 도자기도 나왔다.
상주의 질 좋은 흙을 만지는 그의 거친 손길과 전통 장작 가마의 불길, 그리고 유약이 만나 전통미와 현대미를 가미한 새로운 디자인과 색채의 작품들이 탄생한 것이다.
고향 상주는 그에게 수많은 영감을 주는 곳이기도 하다. 상주의 정취가 묻어나는 감과 연꽃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가 경기도 여주나 이천이 아닌 고향 상주에 뿌리를 내린 이유도 바로 상주도자기의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 진정한 완성은 빈 찻잔을 채우는 것
1994년 결혼한 그는 ‘부부 예술가’로 유명하다. 그와 권기화 작가는 전통물레대장과 조각사의 만남으로 결혼 전부터 화제였다. 남편은 도자기를 빚고, 동양화를 전공한 아내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다. 천생연분이 따로 없다.
바쁜 작품 활동과 연구 중에 도자기 체험교실을 운영하고 틈틈이 강의도 다닌다. 흙을 만지는 행복함을 다른 사람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냥 흙 한줌 주고 놀게 한다. 흙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누구나 행복하게 하는 힘을 지녔다. 누구라도 체험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다.
작품들에 둘러싸인 방 한가운데는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을 꾸며놓았다. ‘상주요’를 찾는 손님들에게 차를 권하는 것은 그의 즐거운 취미다.
“저의 그릇은 언제나 미완성입니다. 빈 잔을 차로 채우고, 마음을 나눠야 비로소 그릇이 완성 되지요. 늘 나누고 또 나누고 싶은 마음으로 차 한 잔 올립니다.”
다시 태어나도 흙을 빚겠다는 그에게 지난 30여 년의 세월은 찰나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저 흙이 좋아서 흙을 빚는 행복을 나누며 살아온 욕심 없는 세월이었다. 차를 나누고 마음을 채워야 완성된다는 도자기의 미학을 더듬어온 아름다운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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