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이은지 기자] 대한민국에서 영어는 필수과목이다. 어느 정도로 필수과목이냐 하면, 노인대학을 아울러 양로원에도 영어 프로그램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팔십 먹은 할머니 나옥분(나문희)씨가 있다. 구청에는 민원을 8000건을 넣고, 영어 학원에서는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 눈엣가시인 진상 할머니. 영화는 옥분씨의 학구열로부터 시작한다. 영어가 지독히도 배우고 싶은 이 할머니. 대체 영어가 왜 배우고 싶은 걸까. 입양간 아들이 있어서? 미국에 친척이 있어서? 다 아니다. 옥분씨는 영어로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그리고 옥분씨의 눈에 걸린 건 원리원칙주의자 9급 공무원 박민재(이제훈)다. 민재씨는 동네 민원왕인 옥분씨가 영 마뜩찮다. 눈에 걸리는 온갖 위법사항을 고쳐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민원서류를 내미는 옥분씨는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골칫거리다. 그런데 어느 날, 옥분씨가 민재에게 다가와 말한다. “나 영어 좀 가르쳐 줘.”
영화 ‘아이 캔 스피크’(감독 김현석)는 그렇게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부터 다룬다. 거미줄처럼 얽힌 인간관계와 그 사이를 오고가는 감정은 한 가지로 정의하기는 어렵다. 영화의 전반부는 옥분씨와 민재의 악연이 온정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따뜻한 눈으로 살핀다. 딱딱하기만 한 줄 알았던 민재의 사연, ‘도깨비 할머니’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외로워서 남들을 열심히 챙기는 것이었던 옥분의 이야기가 차례차례 풀리며 관객들은 어느새 옥분씨의 영어공부를 응원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정만을 다루는 영화였다면 추석 대목에 떡하니 극장 정면에 내걸려 개봉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기 어려운 때가 온다. 그리고 아무리 초라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도 개개인에게는 저마다 나이만큼의 역사가 있다. 옥분씨가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꼭 해야 할 말이며, 자신의 역사다.
영화 내내 배우 나문희는 ‘도깨비 할머니’로만 규정될 수 없는 옥분씨의 면면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얄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가장 보잘것없지만 가장 위대한 할머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뻔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눈물은 본래 뻔한 이야기에 흐르기 마련이다. 9월 말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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