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사발에 우려낸 70년… 깊고 진득한 도예인의 삶

찻사발에 우려낸 70년… 깊고 진득한 도예인의 삶

기사승인 2017-10-23 19:44:50

 

 

경북 문경시 당포리 성주봉 자락에 자리 잡은 문경요. 입구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장작더미까지 예사롭지 않은 문경요 옆에는 아름다운 도천도자미술관이 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도예명장이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인 도천(陶泉) 천한봉 선생은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찻사발을 만든다.

물레를 돌리는 그의 모습에선 찻사발과 사랑에 빠진 스무 살 청년의 뜨거운 열정이 느껴진다. 그 마음을 담아 빚은 그릇에 우려낸 차 한 잔은 또 얼마나 애틋하고 향기로울까. 

 

◆ 쉼 없는 열정으로 이어가는 도예의 혼
그는 한국에서 찻사발인 다완(茶碗)을 가장 먼저 재현했으며 찻사발의 의미와 가치를 외국에 알린 도예명장이다.

소박하고 질박한 멋의 조선시대 막사발은 그의 솜씨에 의해 옛것 그대로 재현되기 시작했다. 그가 빚어내온 찻사발은 조선시대 것처럼 꾸밈없이 담백하고 순수하다.

70년 한 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도예는 무엇이었을까.

열네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고 4형제 중 장남인 그는 어린나이에 가장이 됐다. 처음엔 먹고 살기 위해 도자기공장에서 일을 했다.

“나이도 어리고 할 줄 아는 게 없다보니 허드렛일이나 잔심부름을 했고, 하루 종일 일해도 품삯이 적었지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려면 그릇 만드는 기술을 배워야 했어요. 호롱불을 켜놓고 밤새 물레를 돌리던 초심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맨발로 물레를 차다보면 살이 터지고 닳아서 피가 흐르다 나중에는 굳은살로 변했다. 고무신이 시중에 나오자 신고 작업했지만 얼마 안가서 구멍이 뚫리곤 했다.

전통이니 예술이니 그런 걸 몰랐던 시절에도 그 열정만은 남달랐다. 도공의 길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치열하게 그릇을 빚던 그는 몇 년 뒤 문경 최고의 도예기술자로 실력을 인정받았고, 1972년 문경요를 설립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찻사발을 만들기 시작하고 고려다완(이도다완)을 완벽하게 재현하면서 도예가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생계를 위해 만들었던 그릇엔 어느새 도공의 혼이 담겼다.

 

3년 뒤 일본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열린 ‘한국문화 5천 년 전’에 출품을 시작으로 전시회만 150여 회 가졌다. 당시 일본의 소장가들은 ‘대한민국 문경요’에서 재현한 전통 막사발을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꼽았다. 2002년에는 일본 왕실에서 사용할 화병를 만들기도 했다.

1995년 대한민국 도예명장으로, 2006년에는 경북 무형문화재 사기장(흑유자기)으로 지정된 그의 도예 기법은 전통 발 물레와 독창적인 재료를 고수하는 열정에 있다.

전통적인 방식을 지키기 위해 발 물레를 고집하고 사과나무를 태운 식물성 재를 유약으로 쓰는 등 자신만의 작업세계를 고수해왔다.

흙을 만지며 사는 것이 건강의 비결인 것 같다는 그는 팔순을 넘겨서도 쉬지 않는 열정으로 수제자인 딸 천경희 작가에게 도예기법을 전수하고 있다. 천 작가 외에도 40여명의 제자가 있다. 문경에서 도자기하는 이들의 반은 그의 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0~2000년대 흑유자기와 같은 전통자기를 현대적인 디자인에 접목시키는 과정을 거치면서 2009년에는 천 작가와 함께 연구·개발한 도천유약과 흑유유약을 특허 등록하기도 했다.

그의 전통 찻사발이 천 작가에게로 이어지며 보다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디자인으로 변화하는 모습은 도천도자미술관에서 만날 수 있다. 

 

◆ 사람이 만드는 그릇, 그릇이 만드는 사람
천한봉 선생은 줄곧 40여 년 전 일본 교토에 있는 대덕사에서 대정호 첫사발을 만났던 감동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2012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 감동을 전하고자 248㎡(약 75평) 규모의 도천도자미술관을 건립했다.

도천도자미술관은 그가 70여 년간 만든 작품과 문경 지역의 도자기 200여 점을 전시 중이며, 구하기 힘든 일본 도자기 관련 서적이나 주문서 등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다.

다완, 사발, 차완, 찻잔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는 찻사발은 물론, 유명한 정호 찻사발, 두두옥 찻사발, 이라보 찻사발 등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도천도자미술관은 찻사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찾아오더라도 찻사발의 역사와 가치를 충분히 알고 감상할 수 있도록 친절하고 꼼꼼한 설명이 준비돼 있는 공간이다.

 

그는 문경찻사발축제의 초대 축제추진위원장이기도 하다. 문경을 대표하는 도예가로서 그의 자부심은 문경 찻사발축제에서도 오롯이 빛난다.

“조선시대 도자기는 왕실과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도자기를 생산하던 관요(官窯)와 민요(民窯)로 나뉘어졌는데 문경은 서민들의 전용 그릇을 빚어내던 민요의 고장이었어요.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망댕이가마’라는 전통 가마를 고집하고 있는 만큼 문경의 찻사발은 자연이 그려낸 그 빛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요.”

그는 앞으로 문경 도자기 역사의 근거로써 문경찻사발축제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도천도자미술관을 완공했으니 제자들과의 전시나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과의 모임이 활발해져 문경 도자기와 관광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꿈도 가져본다.

도천도자미술관에는 그의 예술세계가 비춰지는 글이 적혀있다.

“사람은 그릇을 만들고 그릇은 사람을 만들고… 쓰면 쓸수록 자연스러워지고 깊이 있고 아름다워지는 것이 이 세상에 어디 그리 흔할까. 차의 마음은 소박하고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찻그릇은 쓰면 쓸수록 자연스러워진다.”

수수하고 단아한 찻사발에 평생을 바친 도예명장의 진솔한 마음이 느껴지는 글귀다.

문경=김희정 기자 shine@kukinews.com

김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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