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 운동의 열풍에 문화계도 응답했습니다. 최근 국내외 각계각층에서 자신이 겪은 성범죄를 고백하는 ‘미투’ 운동에 문학계, 연극계가 동참한 것이죠.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며 문단의 원로 역할을 해온 고은 시인과 유명 연극 연출가로 알려진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그 주인공입니다. 과거 두 사람이 저지른 성추행들이 알려지면서 대중의 거센 비난을 받게 됐습니다.
고은 시인의 성추행 사실은 한 편의 시를 통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지난해 12월 계간 ‘황해문화’ 겨울호에 게재된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에는 성추행을 일삼는 En선생에 얽힌 일화가 등장합니다. 해당 시에는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 “어느 출판사 망년회에서 옆에 앉은 유부녀 편집자를 주무르는 En을 보고, 내가 소리쳤다. 이 교활한 늙은이야! 감히 삼십 년 선배를 들이받고 나는 도망쳤다”는 내용이 담겨 있죠.
이에 류근 시인은 자신의 SNS를 통해 “고은 시인의 성추행 문제가 '드디어' 수면 위로 드러난 모양”이라며 “놀랍고 지겹다. 60~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이제야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고 실명을 폭로했습니다. 이어 “소위 ‘문단’ 근처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들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사람 얼마나 되냐”라며 “눈앞에서 보고도, 귀로 듣고도 모른 척한 연놈들은 다 공범이고 주범”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번 논란으로 고은 시인은 결국 이사까지 가게 됐습니다. 고은재단 측은 지난 18일 “더는 수원시에 누가 되는 걸 원치 않는다”며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곳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할 것”이라며 경기도 수원시에서 마련해준 창작공간 ‘문화향수의 집’을 떠난다고 밝혔습니다. 또 지난해 11월 서울도서관에 마련된 고은 시인의 ‘만인의 방’도 3·1운동을 기념하는 공간으로 바뀔 예정입니다. 올해 등단 60주년을 기념해 열기로 한 문학행사도 전면 재검토된다죠.
문학계에 이어 공연계도 곳곳에서 성추행 폭로가 터지고 있습니다. 연극배우 이명행이 성추행 논란으로 공연 중이던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서 하차한 데 이어, 원로 연극연출가 이윤택의 성추행 사실이 알려진 것이죠.
이윤택 연출가의 성추행은 지난 14일 극단 미인 김수희 대표의 SNS 폭로로 시작됐습니다. 김 대표는 10여 년 전 배우로 연극 ‘오구’를 지방에서 공연하던 당시 숙소에서 호출을 받고 이윤택 연출가에게 안마를 해줬다고 고백했습니다. 이후 그가 바지를 내리자 도망쳤다며 당시를 무섭고 끔찍한 기억으로 회상했습니다.
비슷한 일을 겪은 배우들도 동참했습니다. 한 극단 대표 A씨는 지난 16일 오후 자신의 SNS에 2000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배우로 이윤택의 극단에 들어간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폭로했습니다. A씨는 “회식 이후 밤에 숙소로 돌아가는 차량에서 이샘(이윤택)은 내게 안마를 요구하셨고 자신의 성기를 만지게 했다”며 “입으로 하라고 자꾸 힘으로 날 끌었다”고 적었습니다. 이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던 내게 그곳은 큰 성 같았고 덤빌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으며 또 그곳이 아니면 넌 어디에서도 배우로 서지 못 할 거라던 이샘 말이 가슴에 콕 박혀 밤마다 안마를 했다”고 털어놨죠.
또 다른 연극배우 김보리(가명)씨는 “열아홉 살, 스무 살이었던 2001년과 2002년 두 차례 성폭행을 당했다”며 “벗은 몸 닦기, 차량 이동 시 추행 등 모두 동일한 수법으로 겪은 일”이라고 밝혀 김 대표의 폭로에 신뢰를 더했습니다.
이에 이윤택 연출가는 곧바로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입장을 극단을 통해 전했습니다. 19일 오전에는 자진해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를 입은 당사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를 드린다”며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 내 죄에 대해서 법적 책임을 포함한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성폭행 의혹에 대해선 성관계는 인정하지만 “폭력적이거나 물리적인 제압은 없었다”며 “법적 절차가 진행되면 성실히 임하겠다”고 말을 돌렸습니다.
이번 논란에 대해 그동안 곪은 게 이제야 터졌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의 폭로가 또 다른 폭로로 이어지는 패턴도 비슷합니다. 그동안 쌓은 성취로 업계 원로 행세를 하던 이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권력을 무기로 추악한 일들을 벌였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놀랐고 분노했죠.
중요한 건 논란 이후에 일어나야 할 변화입니다. 비슷한 종류의 수많은 성추행이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채 수면 아래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성추행 사실을 알고도 눈 감은 이들이 많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정작 당사자인 고은 시인과 이윤택 연출가가 이번 사태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중요합니다. 설마 살던 곳에서 쫓겨나 이사를 가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정도로 자신들의 죄가 씻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문화계가 다시 반복돼선 안 될 이번 사건을 어떻게 대처하고 어떻게 피해자들을 위로할지 끝까지 지켜봐야 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