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이 시민을 향해 총을 겨누고 행정부와 사법부를 장악하는 쿠데타를 꾀했나’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문건’ 사건 본질이 흐려지고 있습니다. ‘문건이 어떻게 유출됐나’ ‘송영무 국방부 장관은 언제 청와대에 보고 했나’를 두고 진실게임을 벌이는 양상입니다.
문건의 실체가 드러난 것은 지난 5일입니다.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3월 기무사가 작성한 ‘전시계엄과 합수 업무 수행방안’ 문건을 공개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과 촛불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문건에는 촛불시위가 격화될 경우 탱크 200대, 장갑차 550대, 특전사 1400명, 무장병력 4800명을 동원해 계엄을 시행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심지어 집회 참가자 일부가 청와대 경비 병력의 총기를 빼앗거나 초병에게 위해를 가하면 ‘신체 하단부를 사격’하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죠.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평화적으로 진행됐던 촛불집회. 촛불을 든 국민을 향해 총부리를 들이댄다는 발상은 마치 37년 전 5.18 민주화운동의 비극을 생각나게 합니다. 파장은 거셉니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은 계엄령 문건을 조사할 독립수사단을 꾸릴 것을 직접 지시했습니다.
계엄령 문건의 수사 핵심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누구 지시로 작성됐나, 어느 선까지 보고됐나, 실행까지 검토했나가 그것이죠. 계엄령은 군령권을 가진 합동참모본부의 업무입니다. 그러니 수사기관에 불과한 기무사가 이 문건을 작성한 것 자체가 월권행위입니다. 군이 박근혜 정권 옹호를 위해 이런 엄청난 계획을 꾸민 것이 아닌지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청와대가 과연 계엄 문건을 몰랐을까요. 정치권에서는 그럴 수 없는 구조라는 주장이 잇따르고 있습니다. 장영달 기무사 개혁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1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기무사는 청와대 군 최고 통수권자에게 군 정보와 보안 등 군을 효과적으로 통솔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하는 부대"라며 지시 주체를 두고 "대통령, 최하 안보 책임 집단"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의원 역시 지난 6일 같은 방송에 출연해 “계엄 발동과 위수령은 국방부 장관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당연히 윗선이 있었을 것”이라며 “박 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됐을 수도 있다”고 발언했죠.
단순 검토에 그치지 않고 실행까지 염두에 뒀는지도 핵심 관건입니다.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은 계엄령 문건에 대해 “비상상황 시 위수령과 계엄령 법적 요건을 살펴본 내부 검토 자료에 불과하다”고 해명해왔습니다. 그러나 기무사 외 다른 부대가 관련 문건을 주고받은 정황이 드러나면 그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을 겁니다. 실제로 계엄령을 시행할 의도가 있었다는 말이기 때문이죠. 군인권센터 주장대로, 관련자들은 내란 예비음모죄 혐의를 적용받을 수 있습니다.
문건이 공개된 지 십여 일이 지난 지금, 어느새 본말은 전도됐습니다. 뜬금없이 문건 유출을 문제 삼는 목소리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또 송 장관이 지난 3월 보고를 받고도 왜 수사 지시를 하지 않았는지, 청와대 보고시점을 두고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과 송 장관의 말이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대해서 연일 억측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지난 9일 김성태 한국당 원내대표는 “문건 그 어디를 봐도 쿠데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며 “문건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배경에 대해서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음모론을 제기했습니다. 한국당은 다음날 문 대통령이 진상규명을 촉구하자 ‘적폐몰이’ ‘침소봉대’라고 반발했죠. ‘군 개혁에 기무사가 강하게 저항해 이를 견제하는 차원에서 문건이 공개됐다’는 근거 없는 소문까지 나왔습니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16일 KBS ‘최강욱의 최강시사’에 출연해 “지금 청와대 민정수석이 보고를 받았나, 아니면 송 장관이 보고했느냐 이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이미 다 지나간 것이고 그렇게 따질 것 같으면 군인권센터는 왜 가만히 있었느냐.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한다. 수사에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다는 게 제 생각”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제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과연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자신의 주장대로 문건 작성을 지시한 당사자일까요. 한 전 장관, 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 나아가 박 전 대통령은 계엄령 시행 계획을 알았을까요. 아니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제3자’가 있을까요. 밝혀야 할 사안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책임자를 확실히 밝혀 처벌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일부 ‘물타기’ 움직임에도 우리가 계엄령 문건 사건의 본질을 잊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정진용 기자 jjy479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