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휴가를 아프리카 케냐로 간다고 하자 주위 반응이 대단했다. 아마도 원시부족과 생활하며 날 것을 먹고 사자·얼룩말과 초원을 뛰노는 상상을 한 모양이다. 북극을 가도 모자랄 판에 웬 아프리카냐는 반응도 적지 않았다.
예상은 대체로 적중했다. 원시부족과 하룻밤을 보냈고, 즉석으로 만든 음식을 먹었으며, 사파리를 달렸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케냐는 덥지 않았다. 오히려 추웠다.
그들은 이유를 궁금해 했다. 선교를 간다고 하니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쉼이 아닌 ‘일’을 택한 내게 돌아온 말은 ‘잘 쉬고 와라, 선물 사와라’가 아닌 ‘수고해라, 무리하지 마라, 살아 돌아와라(?)’였다.
선교를 준비하며 든 감정은 두 가지다. 하나는 첫 선교를 떠나는 기대였다. 한국인 선교사가 예배를 인도하면 목회자와 청년이 보조하는 식이다. 지난해는 청년만 다녀왔다. 올해는 기성세대도 동참했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땅을 밟는 설렘이었다. 아프리카는 막연했다. 쉽게 갈 수 없는 지역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우리가 만난 마사이 족은 현대문명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6월 30일 오전 1시 5분 비행기로 출국했다. 대한민국 인천을 떠나 케냐 나이로비까지 약 20시간을 날아왔다. 직항이 없어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를 경유했다.
기내식을 두 번 먹었다. 첫 식사는 한 입 먹고 뚜껑을 덮었다. 입에 맞지도 않았지만 난기류가 심해 먹기 불편했다. 두 번째는 조식이랍시고 계란찜과 소시지, 과일 등이 나왔다. 그나마 나았지만 소금과 후추를 전부 써야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4시간을 머물렀다. 기도실과 발 씻는 시설이 인상적이다. 공항 레스토랑에서 미지근한 탄산음료를 마시며 시편을 묵상했다.
아디스아바바에서 나이로비까지는 2시간가량 소요됐다. 나이로비 세관이 엄격했던 기억이 난다. 사역에 쓸 물건을 담은 박스가 15개였다. 눈치껏 빠져나간 팀원도 있었다. 기자는 운이 나쁘게도 박스를 뜯고 내용물을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케냐 기후는 제법 선선했다. 구름낀 하늘이 한국에서 온 손님들을 맞았다. 습한 기운이 훅 느껴졌다.
나이로비 공항에서 숙소까지 버스로 6시간을 달렸다. 공항 주위는 건물이 많고 도로는 아스팔트가 깔려있었다. 케냐는 좌측통행이다. 그리고 교통체증이 매우 심각하다.
차들은 좁은 도로에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녔다. 도로 상태도 좋진 않았다. 맨땅에 아스팔트를 발랐다고 해야 할까. 먼지가 많아서 마스크를 쓴 채 이동해야 했다. 물티슈로 팔과 얼굴을 수시로 닦았다. 세계 3대 빈민촌이라는 동네를 지나쳤다. 양철 판자촌에 들어가면 길을 잃고 강도를 만날 수 있다고 한다.
얼마 안 가 풍경은 한적한 시골로 바뀌어있었다. 풀밭에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흔했다. 곁에는 염소와 양이 풀을 뜯고 있다. 이 곳 사람들은 소와 염소, 양을 기른다. 가축 무리가 도로를 점령해서 차를 세워야 할 때가 간혹 있었다. 가축이 많을수록 부유한 가정에 속한다.
차를 세우면 장사꾼들이 벌떼처럼 몰려와 과일이나 옥수수를 팔았다. 케냐는 옥수수가 주된 곡식이다. 말린 옥수수를 불에 구워서 파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케냐는 개신교도와 가톨릭교도를 포함해 복음률이 80% 라고 전해진다. 이동을 하면서 간간히 교회를 볼 수 있었다. 대부분이 가건물이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한껏 멋을 부린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 일행은 보이는 사람마다 손을 흔들고 잠보(케냐어로 ‘안녕하세요’)를 외쳤다. 별 거부감이 없었는지 현지인들도 우리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어줬다. 나록이라는 지역에 있는 호텔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쇠고기 덮밥에 기대했다가 몇 숟갈 뜨고 말았다.
산 넘고 물 건너 오후 10시 8분(현지시각) 모를로 숙소에 도착했다. 바람이 강하게 불고 매우 추웠다. 한국은 여름이지만 케냐는 겨울이다. 미리 준비해온 긴 소매 옷을 꺼내입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곳이라 가져온 손전등과 LED 라이트로 어둠을 밝혔다. 도착 감사 기도를 하고 배정된 방에서 첫날밤을 보냈다.
선교사는 사전에 ‘호텔’에서 잘 것이라고 귀띔했었다. 숙소는 시멘트 건물이었다. 우리는 철제 이층침대에 침낭을 깔고 잤다. 장거리 여행에 심신이 지친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앞으로 사역에 대한 부푼 기대를 안고 말이다. 달빛이 유난히 밝은 밤이었다.
송금종 기자 song@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