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의료노조 나순자 위원장과의 인터뷰는 7개월만 이었다. 그간 나 위원장을 본 곳은 주로 아스팔트 위에서였다. 굳게 이를 다물고 다부지게 목소리를 먼발치에서 바라보거나 간단한 눈인사를 보낸 게 전부였다. 그리고 이 시간동안 보건의료계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터져 나왔다.
지난해 말부터 을지병원, 한림대의료원 등에선 속속 노동조합이 만들어졌다. 최근에는 가천대학교길병원에서도 새노조가 결성됐다. 아이러니한 건 ‘노동 존중 병원, 환자 안전 병원을 만들자’란 외침은 병원이란 폐쇄적 조직의 가장 하층부에 있는 이들에게서 나온다는 점이었다.
24일 오전 서울 당산에 위치한 보건의료노조 신사옥에서 나 위원장을 만났다. 그는 지난 7개월여 동안 보건의료노조가 해온 일들을 설명했다. 병원내 시간 외 근무를 막기 위해 각 지부의 반대를 무릅쓴 것이나 파견 노동자의 정규직화 부분에 이르러선 종이에 그려가며 설명을 하기도 했다. 나 위원장은 “노동 존중 사회는 노조 결성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말했다. 이날 나눈 대화 모두를 기사에는 담지 못했다. 인터뷰가 끝나고 난 뒤 한가득 숙제를 짊어진 기분이 들었다.
◇ 노동조합이 필요한 이유
- 최근 가천대학교길병원에서 새노조가 결성됐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것 같은데.
길병원에는 다수의 조합원이 소속된 노조가 있었지만, 그 역할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근로조건도 개선되지 않았다. 지난 1999년 새노조 설립 시도가 있었지만, 복수노조 허용이 안돼 끝내 불발됐다. 이후 새노조 설립에 관여한 노동자들은 사측의 감시와 해고, 부서 및 인사이동 등을 당했다.
결국 노동자들은 보건의료노조를 찾아왔고, 그렇게 작년 10월부터 새노조 설립 준비를 진행했다. 기존 노조 사무국장도 새노조에 동참 의사를 밝혔다. 현재까지 조합원 수는 600명이 넘는다. 지난 20일 열린 창립총회 당일 100여명의 조합원이 기존 노조를 나와 새노조에 동참했다.
노조는 사용자 측과 교섭 창구 단일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노조가 사측에 교섭을 요구하면 사측은 이를 공지해야 한다. 기존 노조는 20일 오후 위원장 선거를 했는데, 토요일에 사측이 교섭 요구 공고를 냈다. 주말에 ‘교섭 요구 사실의 공고’를 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얼마나 급했으면 병원 직인도 안 찍혀있었다. 자율교섭이 안되면 조합원 숫자를 비교해서 조합원 숫자가 많은 쪽이 교섭권을 가져간다. 이를 노린 게 아닌지 의심된다. 그밖에도 CCTV로 새노조의 순회 활동을 감시하거나 압박하는 등 여러 방해 행위가 있었다.
- 길병원 새노조 설립의 의의를 짚어본다면.
노조가 없는 대학병원의 분위기는 전근대적이고 독재적이며, 노동조건은 열악하고 노동자들은 존중받지 못한다. 노동자들은 출근하면 휴대전화를 반납해야하고, 선정적인 장기자랑을 강요받거나 오너 찬양 영상을 찍어야 했다.
정부가 노동 존중 사회를 만들겠단 공약을 했지만, 이는 정부만의 몫은 아니다. 사업장에 노조가 생기면 갑질은 바로 사라진다. 형편없는 복지나 임금도 회복된다. 노동이 존중받기 위해선 노조가 결성되어야 한다. 정부는 임금 체불 사업장에 대한 조치는 매우 신속하지만, 부당 노동 행위는 그렇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빠르고 강력한 처벌이 요구된다. 그래야만 노조할 권리, 노조 결성이 좀 더 쉬워진다.
(보건의료노조는 25일 인천노동청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길병원의 부동노동행위 특별근로감독을 촉구하기로 했다.)
- 침례병원의 공공병원 전환 가능성은 어느 정도로 보나.
전환 가능성을 매우 높게 보고 있다. 그러려면 부산시의 역할이 중요하다. 부산시는 오거돈 시장 당선 이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파산재판부에도 공공병원 전환을 위해 매각 절차를 늦출 것을 요구했다. 보건복지부와 지역대책위, 부산시 등이 침례병원의 공공병원 전환을 위한 TF를 만들고 있다. 다만, 공공병원의 성격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다른 문제다. 건강보험공단의 직영병원이나 치매병원 전환, 부산시 병원 등 공공 인수 후 좀 더 논의가 될 것이다.
- 공공병원 전환에 적잖은 비용이 소요되고, 이는 부산 의료의 치우침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
1000억 원이 소요될 것으로 부산시는 판단하고 있다. 복지부는 부산시가 역할을 하면 자신들도 참여하겠단 입장이다. 때문에 전환 비용을 오롯이 부산시가 전부 부담하는 건 아니다. 복지부도 일정 정도 부담할 수 있다. 사실 타 지역에 비해 부산시민의 건강 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 전국의 공공의료기관 비율은 5.8% 인데 반해, 부산은 2.7%에 불과하다. 기대 수명도 6~8세가 더 낮다. 이는 그동안 부산시가 공공의료와 시민 건강에 투자를 안했다는 반증이다. 민간에 매각되어 그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생각해보라. 부산 시민의 건강은 어떻게 되나. 현재 부산 금정구에는 응급실이 있는 종합병원이 한 곳도 없다.
이밖에도 보건의료노조는 지방선거 당시 후보였던 김경수 경남도지사와 진주의료원 재개원과 관련한 정책협약식을 맺기도 했다. 현재 경남도 인수위가 우선 시행할 100대 사업에 진주의료원 재개원이 들어가도록 논의 중이다. 침례병원의 공공병원 전환과 진주의료원 재개원은 5.8%뿐인 공공의료 확대의 출발점이다.
- 지난 한 달여간 진행한 ‘4OUT 국민청원운동’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서서히 불이 붙는 것 같다. 새로운 노조 활동에 대해 사람들이 재밌고 호기심도 가지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동참했다. 여러 콘텐츠도 개발했다. 다양한 노조 활동을 실험해보는 계기가 됐다.
- 현재 의료기관평가인증혁신 TF에 참여하고 있는데, 다음번 평가 인증은 어떤 변화가 있을까.
병원들은 6개월 동안 마치 시험 벼락치기하듯 평가 인증을 준비한다. 직원들은 공부를 하고 없던 규정을 만드느라 시간외 근무가 엄청나다. 환자도 빼고 휴가도 제한해 평온한 병원의 모습을 연출한다. 심지어 노동자들을 환자나 보호자로 둔갑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평가가 끝나면 다시 원위치다. 정부 기관에서 인증을 하면 그 병원은 ‘좋은 병원’이 된다. 이건 국민을 속이는 거다.
이번 평가 인증은 이대로는 안 된다고 강력히 문제제기를 했다. 결국 복지부는 7월 말까지 인증기준 수립을 연기하고 TF가 꾸려졌다. 쓸데없는 암기와 시험은 없애려고 인증지침서와 안내서를 준비 중이다. 3주기 인증 평가에선 기존 문제를 개선하는 것으로 하고 병원에 필요한 적정 인력 연구는 4주기에 반영하는 것으로 가닥은 잡아가고 있다.
현재의 인증원은 인증을 받아야할 병원들과 각 의료계 협단체에서 돈을 투자해 만들어졌다. ‘셀프 인증’이다.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의사결정구조에 많이 포함되어야 들어가야 실효성 있는 인증 기준과 평가를 만들 수 있다.
- 올해 후반기 보건의료노조가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 무엇인가.
‘중층적 교섭 구조’, ‘조합원 10만명 달성’, ‘병원 노동 환경 개선’을 추진 중이다. 우선 현재 사립대병원과 국립대병원들은 산별교섭에 불참하고 있다. 전국을 돌면서 병원장들과 면담했다. 병원을 병원답게 만들기 위해 보건의료 제도와 정책을 제대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설득했다. 노사가 산별교섭의 틀에서 정책적인 협의를 진행, 정부와 정책 협의를 하자고 했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현재 병원 실무자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논의하고 있다.
관련해 노정협의와 사회적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보건의료노조가 바라보는 사회적 대화는 정부, 사용자, 시민사회단체가 함께 참여해 올바른 제도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본다. 보건의료노조는 이를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 11일 간호사 처우 개선과 관련해 노사정이 머릴 맞대고 정책 협의를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