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여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이탈리아, 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8-12-15 13:00:00

프란체스코 대성당 앞 정원 위로 난 도로에서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성당의 모습을 다시 감상한다. 검은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이지만 밝게 빛나는 대성당의 모습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본다. 세상은 여전히 컴컴하고 혼란스럽기 때문에 프란체스코 성인의 정신은 여전히 값진 것이 아닐 수 없다 하겠다. 그런 프란체스코 성인이었지만,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숱한 일을 겪어야 했다. 포로로 잡혀갔다가 아버지가 내준 보석금으로 석방돼 고향으로 돌아올 때 고개를 숙인 이유가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고개 숙인 프란체스코 성인의 기마상을 옆으로 조금은 급한 듯한 경사의 언덕길을 따라 올라가면 미네르바 신전의 유적에 이른다. 미네르바 신전은 기원전 1세기 무렵 도시의 4인 연대장관(quattuorviri, 콰퉈르비리)이던 그네우스 케시우스(Gnaeus Caesius)와 티투스 케시우스 프리스쿠스(Titus Caesius Priscus)의 발의와 재정지원으로 건설됐다. 헤라클레스에게 헌정된 것이라고 기록된 돌이 발견됐지만, 여성의 조상이 발견되면서 미네르바 신전으로 부르게 됐다.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걸려있는 조토의 프레스코화를 보면 창살이 질러진 창문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중세시대에는 재판소와 부속된 감옥으로 사용됐던 모양이다. 지금은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데, 1539년에 지어지고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된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Santa Maria sopra Minerva) 교회이다. 고대 신전의 건축 가운데 파사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파사드는 장식틀(architrave)과 작은 박공을 지지하는 6개의 코린트양식의 기둥으로 구성돼있다. 원래의 기둥은 튼튼한 채색 석고로 덮여있었다. 제대 부근에서도 사원의 일부가 발견됐다.

바빌론식으로 쌓아올린 성 프란체스코 성당의 하부교회에 대한 혐오감 때문에 외면하고 언덕을 올라갔다는 괴테는 이 건축물을 본 느낌을 이렇게 적었다. “보라. 가장 많은 찬사를 받아 마땅한 건물이 내 앞에 서 있지 않은가. 이것은 내가 본 최초의 완전한 고대 기념물이다. 이런 작은 도시에 알맞은 음전한 신전”이라고. 

신전 앞 광장 풍경부터 신전의 파사드 모습에 이르기까지 깨알같이 묘사한 괴테가 신전의 내부 모습에 대해서는 한 줄도 적지 않았다. 아마도 그가 이곳을 방문한 1786년에는 이미 신전을 교회로 바꾸고 더해서 바로크 양식으로 개축한 뒤였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의 내부는 화려한 로코코양식으로 돼있다. 좌우에 서있는 중세풍의 건물 사이에 끼어서 그 옛날 화려했을 코린트 양식의 기둥이 옛 모습을 잃고 앙상한 듯 서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미네르바 신전을 보고나서 35분 정도 자유시간이다. 신전 앞에 있는 광장에서 다시 모이기로 했다. 시정촌 광장이라고 번역되는 피아자 델 코뮌 (Comia del Comune)은 로마시대에는 아케이드로 둘러싸인 중앙 테라스에 해당하는 넓고 길쭉한 공간이었다. 로마제국이 무너진 뒤로 개인이 집을 지으면서 점차 좁아져 지금은 거리의 교차로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광장의 동쪽 끝에 있는 분수대는 13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1467년에도 재건됐다고 한다. 지금의 분수대는 1772년에 건축가 발레리(Valeri)의 설계에 따라 아씨시의 석공 주세페 마르티누치(Giuseppe Martinucci)가 제작한 것이다. 하부 구조는 9각형으로 된 수반 위에  산 프란체스코, 산 루피노, 디베 마리에 등, 도시의 3개 지역을 나타내는 3마리의 사자로 장식했다. 가운데는 2개 층으로 된 원형의 수반을 겹쳐 올렸다. 

분수대 남쪽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면서 다른 여행팀이 몰려있는 것을 발견했는데 프란체스코성인이 태어난 집이라고 한다. 성인의 아버지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 (Pietro di Bernardone)의 집이다. ‘프란체스코 성인의 아버지 집의 유적 입구(INGRESSO AI RESTI DELLA CASA PATERNA DI S. FRANCESCO)’라는 표지가 있다. 

평범한 청년으로 자라는 동안 살았던 집이며, 영성의 깨달음에 나선 뒤로 아버지에게 구금을 당한 장소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코 성인의 아버지는 세속적인 상인이었기 때문에 프란체스코 성인의 행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입구에는 단테의 ‘신곡-천국편’에 나오는 한 대목이 걸려있다. 

“우발도 성인이 선택한 언덕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강물과 토피노 강 사이에는 비옥한 산자락이 고귀한 산 아래로 펼쳐져 있으니, / 페루자는 포르타 솔레를 통해 추위와 더위를 맛보고, 그 뒤에서는 괄도가 노체라와 함께 무거운 멍에를 지고 한탄을 합니다. / 이 산줄기가 가장 험하게 깎아지는 곳에서 태어난 분은 세상에 광채를 발했는데, 그 빛이 동방의 갠지스 강까지 이르렀소. / 그래서 그곳을 말할 때에는 짧게 줄여 아시시라고만 하지 말고 그 말뜻 그대로 오리엔트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프란체스코 성인이 옷을 팔던 가게와 계단을 올라가면 아버지의 명으로 갇혀있던 방도 볼 수 있다. 집을 지나면 작은 공간이 나타나는데 키에사 누오바 광장(Piazza Chiesa Nuova)으로 키에사 누오바가 있는 곳이다. 새로운 교회라는 의미의 키에사 누오바는 당시 기준으로 아씨시에서 마지막으로 지은 교회건물이었기 때문이다. 1615년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난 집 위에 지었다. 광장 귀퉁이에는 프란체스코 성인의 부모상이 서 있다.

1613년 아씨시를 방문한 프란체스코수도회의 안토니오 데 테레호(Antonio de Trejo) 총장은 프란체스코 성인이 태어난 곳이 황폐해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로마의 스페인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스페인왕 펠리페3세로부터 6천 두카트의 후원을 받아내 집을 사들여서 교회를 지었다. 1615년 9월 20일 착공한 교회건물의 초석은 산 루피노(San Rufino) 대성당에서 가져왔다. 후기 르네상스양식으로 지은 이 교회의 특징은 중앙의 돔을 초롱과 원통형을 결합한 케이슨 양식의 천정을 두었다는 점이다. 교회 내부의 높은 제단은 프란체스코 성인의 방위에 세워졌다.

다시 광장 분수대로 나와 윗길로 걷다보니 작은 성당이 나온다. 성 루피노 두오모이다. 루피노 성인(St. Rufinus)는 3세기경 아씨시에 기독교를 전하고 초대 주교를 맡았다가 순교했다. 두오모는 여러 성당 가운데 그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만이 얻을 수 있는 이름이다. 아씨시의 두오모는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이 아니라 바로 성 루피노 성당이다. 아씨시의 수호성인인 성 루피노에게 헌정된 성당이기 때문이다. 아씨시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코 성인과 클레어 성녀도 이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지금의 성당은 같은 장소에 세워진 세 번째 교회다. 첫 교회는 5세기 초에 지어졌다. 교회를 세운 장소는 로마광장(Roman Forum)이 있던 곳이다. 두 번째 교회에 관한 기록을 보면, 1028년 아씨시의 주교가 무너져 내린 교회가 있던 자리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지어진 기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종탑은 로마식 저수조 위에 지었다고 했다. 교회의 애프스의 벽에 있는 비문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지금의 교회는 1140년, 조반니 다 구비오(Giovanni da Gubbio)의 설계를 바탕으로 고딕양식으로 건축된 것이다. 종탑을 제외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두 번째 교회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것이다. 

파사드는 아씨시 인근에 있는 해발 1290m 높이의 수바시오(Subasio)산에서 나는 핑크색 돌로 지었다. 파사드는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맨 위에는 가운데 반원형의 아치가 있는 삼각형으로 띠모양으로 장식되는 프리즈나 모자이크를 넣기 위해서였다. 중층은 맨 위의 아치와 일치하는 두 개의 붙임기둥에 의해 세 부분으로 나뉜다. 

세 부분에는 각각 장미창문이 들어가는데, 가운데 장미창문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가운데 장미창문은 동물 위에 서 있는 세 명의 텔레몬이 떠받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텔레몬은 아에기나(Aegina)의 아에아쿠스(Aeacus)왕과 산요정 엔데이스(Endeïs )의 아들이다. 장미창문의 네 귀퉁이에는 네 명의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맨 아래층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구성돼있으며, 세 개의 출입구가 있다. 가운데 출입구의 기둥 아래에는 사자가 그리고 양쪽 출입구의 기둥 아래에는 상상의 동물인 그리핀의 조형이 서 있다. 아치 상부의 반원형 구획에는 달과 해 사이에 자리한 그리스도와 어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와 성 루피누스가 좌우에 서있다.

1571년 페루자 출신 건축가 지안 갈레아쪼 알레시(Gian Galeazzo Alessi)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내부를 후기 르네상스양식으로 완전히 바꿔놓은 것이다. 본당은 커다란 기둥과 원뿔 그리고 돔으로 구분돼 있는 두 개의 통로가 있다. 교회의 내부에는 16세기로부터 17세기에 이르는 화가들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교회의 마루에는 유리가 깔려있는데, 11세기에 지은 교회의 흔적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지하에는 3세기의 이교도 로마석관을 볼 수 있는데 성 루피누스의 유해가 들어있다는 주장도 있다. 왼쪽 출입구는 대성당 박물관으로 연결되는데, 푸키오 카파나(Puccio Capanna)의 벽화, 도노 도니(Dono Doni)의 작품 등 고고학적 유물이 보존되어 있다. 오른쪽 출입구에서는 대성당 토굴로 들어갈 수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수석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8 동 기관 평가수석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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