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육상요정’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해주(고성희)는 부상으로 선수 생활을 접고 서른이 됐다. 시집가라는 집안의 성화에 시달리는 건 물론이다. “뭘 해야 할지도 아직 모르는데 누구와 살지부터 결정하라니.” ‘어쩌다 결혼’(감독 박호찬, 박수진)의 시작을 장식하는 해주의 내레이션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다. 등 떠밀려 나간 선에서 시작된 발칙한 가짜 결혼. 상상할 수 있는 막장 드라마의 가짓수는 무한에 가깝지만, ‘어쩌다 결혼’은 덤덤하고 여상하게 21세기에 결혼이 가진 의미와 허상을 짚어나간다.
선자리에서 만난 성석(김동욱)의 차림새와 태도로 해주는 순식간에 상대 또한 선에 억지로 나왔음을 알아차린다. 딱 30분만 서로 시간 때우고 돌아가자는 해주의 제의에 성석은 반갑게 응한다. 사실 성석 또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지만, 이혼한 데다가 아이까지 있는 여인이기에 집안에서 반대할 것이 불보듯 뻔해 이도저도 못 하다가 떠밀려 선자리에 나온 것이다.
그렇게 30분이 지나 ‘쿨’하게 헤어진 두 사람은 어쩌다 보니 또 식당에서 만나게 된다. 어쩌다 합석하고, 어쩌다 술을 마시게 되고, 어쩌다 보니 가짜 결혼에 합의한 두 사람. 성석은 해주와 가짜 결혼했다가 이혼함으로써 스스로에게 ‘흠집’을 내자는 계산이고, 해주 또한 ‘이혼하고 나면 더는 결혼하란 소리 안 하겠지’라는 속셈이다. “3년의 결혼 기간 동안 해외 가서 따로 살고, 생활비 주고, 하고싶은 거 다 해요”라는, 어쩌면 꿈같기도 한 성석의 제안. 그리고 결혼을 위한 두 사람의 2인 3각 계주가 시작된다.
시작부터 삐걱댄 결혼이 수월할 리 없다. 쉽게 생각한 결혼에는 너무 많은 장벽이 기다리고 있다. 상견례, 재산분할각서, 계약서 같은 절차부터 서로의 가족을 만나는 것까지. 영화는 예상된 결말을 향해 달리지만, 그 안에 로맨스나 환상은 없다. 로맨틱 코미디라기보다 코미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꾸며낸 애정과 관계가 보여주는 허상은 87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서 속전속결로 처리된다. 수월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꼬여만 가던 와중, 모두가 예상한 파국이 기다린다.
두 사람의 시작이 허술했듯 영화 또한 허술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어떤 부분은 ‘하이퍼리얼리즘’이라고 말할 만큼 리얼하다. 현실을 회피하다 못해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회피하려 드는 성석의 모습은 일관적이며, 그런 성석의 가벼움에 일조하고 싶었지만 결국은 끝까지 남들을 속이지 못하는 해주의 모습은 공감을 부른다. 정우성, 염정아, 조우진, 임예진 등 화려한 카메오 출연이 백미다. 오는 27일 개봉. 12세가.
이은지 기자 onbge@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