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영화감독이 새 영화를 찍을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몇 년간 아이디어를 영화로 옮기기 위해 노력하던 감독은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금방 친구가 되고 촬영에 동참한다. 평범해 보였던 남자는 갑자기 세계를 휩쓴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국가로부터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끝까지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내부고발자가 된 남자는 언론을 통해 진실을 폭로하고 국제단체에 근거 자료를 제출한다. 결국 그들의 폭로는 역사를 바꾼다. 진실이 승리하는 뻔한 교훈담. 대체 누가 이런 영화에 투자를 할까.
넷플릭스가 했다. 이유는 충분했다. 모두 실화이기 때문이다. 허구의 상업영화였으면 더없이 진부할 이야기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되어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
영화감독 브라이언 포겔은 자신과 모스크바 올림픽 연구소장 그리고리 로드첸코프의 이야기를 영화 속에 그대로 옮겼다. 자신의 몸에 주사를 맞고 도핑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겠다는 브라이언도 정상으로 보이진 않지만, 천연덕스럽게 그를 도와주는 그리고리 역시 평범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 항상 윗옷을 벗고 영상통화로 브라이언 가족의 안부를 묻던 일상적인 모습부터 스캔들에 휘말려 괴로워하는 극적인 모습까지 영화는 그리고리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았다. 자신이 도핑 전문가라며 올림픽 선수들을 돌봤다는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등 저래도 되나 싶은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히려 올림픽 도핑 스캔들이라는 커다란 사건이 터지자, 영화는 잃었던 중력을 찾은 듯 목표지점을 향해 묵직하게 내려앉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이카로스’는 정말 실화인지 잘 믿어지지 않는 영화다. 영화가 끝나면 뭔가에 홀린 것처럼 휴대전화를 열고 검색하게 만드는 영화기도 하다. 거짓말 같은 엄청난 우연이 영화의 중심에 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스노든 같은 세계적인 내부고발자가 마침 내 친구였다’는 엄청난 우연이 일어나버렸다. 영화감독에겐 말 그대로 얻어걸린 상황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이카로스’가 선댄스영화제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쓴 높은 완성도의 영화가 된 건 아니다. 우연의 주인공 브라이언 역시 만만치 않은 내공을 자랑하는 영화감독이었다는 기막힌 우연이 또 한 번 겹쳤기에 가능한 일이다.
브라이언은 영화를 단순한 도핑 스캔들, 혹은 내부고발자의 이야기로 만들 생각이 없었다. 대신 처음 의도했던 자신이 주인공인 다큐멘터리에 그리고리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더했다. 두 이야기는 도핑이라는 주제로 묶여있을 뿐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전자가 경쾌하다 못해 발칙한 아이디어로 달려간다면, 후자는 개인의 이야기가 국가와 세계적인 시스템의 문제로 확장되는 거대한 이야기를 다뤘다. 브라이언은 영리하게도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그레고리 다큐멘터리의 도입부처럼 집어넣었다. 덕분에 두 이야기의 독특한 화학작용이 폭발해 영화 전체로 퍼져나간다. 어디로 이어질지 모르는 이야기가 주는 흥분감과 막연한 두려움, 긴장감이 가득하다. 후반부에 드러나는 놀라운 진실들은 충격과 공포 그 자체다. ‘내가 대체 뭘 보고 있는 거지’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영화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는 나뉠 수 있다. 소재 고갈에 시달리는 작가, 감독들에겐 언젠가 자신에게도 브라이언 같은 우연이 찾아올 수 있다는 꿈과 희망, 질투를 동시에 안겨줄 복잡한 영화일 수 있다. 또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러시아 선수들이 왜 러시아 소속으로 출전하지 못했는지 궁금했던 누군가에겐 흥미롭고 속 시원한 영화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스포츠나 도핑에 큰 관심이 없는 누군가에겐 지저분하고 불쾌한 이야기, 혹은 검증되지 않은 음모론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준범 기자 bluebell@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