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인터뷰] 솔비 “아픔 경험해본 사람은 권지안을 이해할 거예요”

[쿠키인터뷰] 솔비 “아픔 경험해본 사람은 권지안을 이해할 거예요”

기사승인 2019-06-21 07:00:00

2017년 5월18일, 서울 북한산 아래의 한 미술관. 가수 솔비는 검은 페인트가 칠해진 흰 바닥에 앉았다. 주위를 둘러싼 검은 옷의 남성들이 그를 밀치고 누르고 억압한다. 솔비가 입고 있던 흰 옷은 금세 검게 물든다. 사경을 헤매듯 휘청대는 그의 몸 위로 빨간 페인트가 쏟아진다. 몸부림치는 것 같던 솔비의 팔과 다리에 점점 힘이 실린다. 검은 페인트는 그가 겪은 고통을, 붉은 색은 그럼에도 살아내겠다는 의지를 상징한다.

솔비는 2009년 불법 촬영·유출된 성관계 동영상의 등장인물로 지목돼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해당 동영상 속 여성이 솔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그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했다. 솔비는 이 퍼포먼스를 통해 자신의 아픔을 토해낸다. 퍼포먼스는 엉망이 된 바닥 위에 흰 페인트를 칠하는 것으로 끝난다. 흰 페인트는 뿌려지는 순간 더렵혀진다. 바닥은 검은 색과 빨간 색, 흰 색이 섞여 괴이한 회색이 된다. ‘상처는 덮일 뿐 치유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뒤엉킨 페인트는 하나의 미술 작품이 됐다. 솔비는 이 작품에 ‘레드’(Red)라는 이름을 붙였다.

“‘레드’를 처음 작업한 후 1년 동안은 작품을 제대로 보지 못했어요. 제 상처를 마주하는 느낌이었거든요.” 최근 서울 인사동길 인사아트센터에서 만난 솔비는 이렇게 털어놨다. 그는 창고에 ‘레드’를 박아둔 채 긴 시간 외면했다. 자신의 상처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1년 만에 창고에서 ‘레드’를 꺼내 보는데, 마음이 아파서 많이 울었어요. 제가 얘(‘레드’)를 외면한 게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솔비는 인사아트센터에서 ‘리얼 리얼리티’(Real Reality)란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고 있다. 2017년 시작한 ‘하이퍼리즘’(HYPERISM) 시리즈의 세 작품 ‘레드’, ‘블루’, ‘바이올렛’이 이번 전시를 통해 관람객들을 만난다. 2년 만에 시리즈를 마친 솔비는 “속이 후련하다”며 웃었다. 미술관에는 그림뿐 아니라 솔비가 쓴 글과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도 걸려 있다. “나만의 방식으로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싶어” 마련한 장치다. 

작품들은 ‘셀프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만들어졌다. 가수 솔비와 작가 권지안(솔비 본명)이 함께 작업한다는 뜻이다. 솔비는 살아있는 붓이 된다. 캔버스 위에서 자신의 음악 안에 맞춰 퍼포먼스를 펼치는 동안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는 방식이다. 그는 “한 번 작업을 하고 나면 2~3개월은 몸이 힘들다”면서 “그래도 이 작업 방식을 더 연구해서 발전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반응은 뜨겁다. 솔비 쪽 관계자에 따르면 해외 아티스트들도 ‘셀프 컬래버레이션’에 관심을 보이며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잘 나가던 ‘예능 대세’ 솔비는 어쩌다 그림에 발을 들였을까. 이야기는 다시 2009년으로 돌아간다. 동영상 사건으로 세상과 사람에 환멸을 느낀 솔비는 그림을 그리며 자신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그에게 처음 그림을 알려준 선생님은 ‘잘 그리지 않아도 좋으니 마음에 있는 걸 표현해라’고 주문했다. 솔비는 “선생님을 통해 예술을 대하는 태도와 철학을 많이 배웠다”고 했다. 최근에는 스페인 가우디 성당에서 만난 일본인 조각가 에츠로 소토에게서 큰 용기를 받았다. 솔비의 ‘레드’ 영상을 본 에츠로 소토는 “40년 전에 조각하고 싶었던 돌이 있었는데, 그 돌을 봤을 때의 충격을 받았다”며 그를 격려했다고 한다.

“캔버스는 제가 가장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에요. 타인의 시선에 억압받지 않으며,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걸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창구죠. 미술은 ‘나’다움을 보여줄 용기를 주고 세상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게 해요. 솔비와 권지안을 분리시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요. 솔비가 일정 부분 만들어진 캐릭터인 반면, 권지안은 저 자체거든요.” 

솔비는 권지안이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 절대 정의내릴 수 없는 사람, 내제된 것들이 많은 사람”이라고 했다. “권지안에 대해 말하려면 이상하게 부끄럽다”며 수줍게 웃기도 했다. 한 때 미워했던 ‘솔비’라는 페르소나도 이젠 고마운 존재가 됐다. 지금의 자신을 만들어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내가 솔비이길 바라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한 번쯤 아픔을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권지안을 이해하고 사랑해줄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이은호 기자 wild37@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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