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이후 게르만족의 대이동 시기에 밤베르크 지역은 슬라브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밤베르크가 기록에 처음 언급된 시점은 902년으로 바벤베르크(Babenberg) 가문이 세운 바벤베르크 성을 중심으로 커졌다는 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 오토 2세는 976년 바이에른에서 오스트마르크를 떼어내 변경백의 영지로 만들어 바벤베르크 가문에 하사했다. 바벤베르크 가문은 1156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에 의해 공작령으로 승격되며 오스트리아 지역을 지배했지만, 1246년 헝가리왕국과의 전쟁에서 프리드리히 2세가 전사하면서 대공위시대를 맞았고, 결국 합스부르크 가문에 왕위를 넘겨야했다.
1007년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2세는 뷔르츠부르크 교구를 쉽게 관리하기 위해 밤베르크를 자신의 개인재산으로 만들었다. 그 무렵 밤베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심이었다. 13세기 중반부터 밤베르크는 주교가 행정권한을 행사하게 됐다. 1802년 교회의 토지를 세속화하면서 밤베르크는 독립을 잃고 바이에른의 일부가 됐다.
우리는 뉘른베르크에서 밤베르크로 가는 동안 비가 오락가락해 마음을 졸였다. 다행히 밤베르크에 도착할 무렵 비가 그쳤다. 해외여행 중에 날씨가 맑으면 운이 정말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요즘 유럽은 날씨가 평년과 다를 때가 많아 날씨 정보에 따라서 여행 시기를 결정한다고 해도 날씨가 좋다는 보장이 없다. 구름이 많아 흐린 편이라면 사진의 질이 조금 떨어져서 그렇지 작열하는 햇살을 피할 수 있으니 오히려 나을 수도 있다.
완전히 빗속에서 우산을 받쳐가며 구경을 하는 것이 최악의 날씨조건이라고 하겠다. 그것도 실내가 아니라 야외를 돌아다닐 경우에는 더하다. 이동 중에 비가 오더라도 버스에서 내릴 무렵 그치는 경우라면 그나마 다행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일행 중에 누군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밤베르크에 도착해서는 차에서 내려 레그니츠 강변에 나있는 산책로를 따라 구시청으로 향했다. 강변에 늘어서 있는 집들은 테라스가 강물에 바짝 붙어있다. 강이 범람하면 집이 물에 잠기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물론 구경꾼인 필자가 걱정할 일은 아니겠지만…. 알고 보니 밤베르크의 연간 강우량은 650㎜인데 월별 최저 강수량은 2월경 39㎜, 최고 강수량은 7월경 78㎜에 불과했다. 그러니 폭우가 내려 강이 범람한 적이 없었나보다. 오랫동안 살아온 경험에 따라서 강가에 집을 지어도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레그니츠 강을 따라가다 보면 도움닫기를 하면 뛰어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좁은 강가를 따라가는 산책길이 한가롭다는 느낌이 든다. 가이드를 쫒다 보니 풀밭 위에 조각 작품들이 늘어서 있는 곳을 지난다. 밤베르크 조각공원(Skulpturenpark Bamberg)이다. 밤베르크 콘서트홀의 바로 곁에 있는 8000㎡ 넓이의 조각공원에는 베른트 바겐호이저(Bernd Wagenhäuse)가 제작한 24개 이상의 대형 조각품이 전시돼있다. 그 가운데 ‘닻모습 2002(Ankerfigur 2002)’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찾아보니 스위스 조각가 베른하르트 루긴뷔흘(Bernhard Luginbühl)이 산업폐기물을 활용해 제작한 250×350×250㎝ 크기의 작품으로 2004년부터 전시하고 있다.
마르쿠스 다리(Markusbrücke)를 건너 레그니츠 강변을 벗어나 구도심으로 들어가면 옛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에서 중세의 향기가 느껴진다. 밤베르크 교도소(Justizvollzugsanstalt Bamberg)를 지나면 엘리자베스 교회(Elisabethenkirche)를 만나는데, 엘리자베스 교회는 돔베르크와 미카엘베르크를 연결하는 모래거리(Sandstraße)에 있다. 시민연합에 속하는 지역으로 오래된 작은 건물, 특히 프랑코니아 여관과 술집들이 들어서있다. 그 가운데는 밤베르크의 역사적 양조장 식당인 쉬렌켈라(Schlenkerla)도 있다.
쉬렌켈라 식당이 위치한 브라우엔 뢰벤(Blauen Löwen, 푸른 사자) 건물은 1405년에 처음 언급됐는데 당시에는 졸너(Zollner) 가문이 소유한 도미니크 수도원 인근에 있었다. 뷔트너 아스무스 쉬나이더(Büttner Asmus Schneider)가 1538년 이 건물에서 처음으로 식당을 열었고, 30년 전쟁으로 완전히 파괴된 이곳을 야콥 스텐겔(Jakob Stengel)이 사들여 재건했다. 그 뒤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줌 브라우엔 뢰벤(Zum blauen Löwen), 브라우어리 헬러(Brauerei Heller)를 거쳐 지금의 쉬렌켈라(Schlenkerla)에 이르러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훈제맥주 양조장으로 알려졌다.
쉬렌켈라를 지나면 도미니카너스트라세(dominikanerstraße)를 만나게 되는데, 왼쪽으로 나아가면 밤베르크 옛 시청의 아래다리(untere Brücke)를 만나게 된다. 이 다리의 강 아래쪽 난간에는 쿠니군데 황후(Kaiserin Kunigund)의 동상이 서있다. 쿠니군데는 룩셈부르크 백작 지그프리드 1세(Siegfried I)의 딸로 어렸을 적부터 가톨릭 교육을 받아 신심이 두터웠다. 20살이 되던 해에 바바리아 공작 하인리히 2세(Heinrich II)와 결혼했다. 1002년 하인리히 2세가 바바리아의 왕으로 추대됐고, 1013년에는 오토 3세(Otto III)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다. 쿠니군데는 황후가 됐다.
쿠니군데는 결혼 첫날밤 하인리히 2세에게 “하느님께 정결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 일생을 동정으로 사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하인리히 2세 역시 “실은 나도 그런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 앞으로 남매처럼 지내자. 그러나 세상에는 알리지 말고 끝까지 감추어두자”고 답했다. 이후 두 사람은 정결을 지켰기 때문에 로마의 순교록에도 그녀를 ‘동정녀’라고 기록했다.
두 사람 사이에도 시련이 있었다. 밀고자가 황제에게 그녀의 부정을 고한 것이다. 쿠니군데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불에 의한 ‘시죄법(試罪法)’을 적용해달라고 청원했다. 쿠니군데는 벌겋게 달구어진 12개의 쟁기 보습을 밟아 나갔지만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음으로써 죄가 없음을 증명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황제는 달려가 그녀를 의심한 잘못을 사과했다고 한다.
1007년 쿠니군데 황후는 황제에게 청을 드려 밤베르크 교구를 설정하고, 대성당을 비롯해 수많은 성당과 수도원을 건립했다. 한번은 중병이 든 황후가 병이 나으면 카우푼겐(Kaufungen)에 수도원을 세우겠다고 서원했는데, 이윽고 병이 낫게 됐고, 황후는 1021년 베네딕도 수녀원을 세웠다.
1024년 하인리히 2세가 죽은 뒤 국정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황후는 1025년 카우푼겐 수도원을 봉헌하면서 황후위를 내놓고 수도자의 길로 나갔다. 1033년 죽음을 맞은 그녀의 유해는 밤베르크 대성당에 안치된 하인리히 2세와 합장됐다. 1200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렸음에도 오히려 더욱 겸손하고 정결한 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전파한 바를 인정해 그녀를 성녀로 시성했다.
도미니카너스트라세에서 오른쪽 길로 조금 더 가면 왼쪽 편으로 밤베르크 옛 시청건물로 들어가는 위쪽다리(obere Brücke)가 있다. 발베르크의 옛 시청건물이 레그니츠 강의 인공섬에 세워진 사연이 있다. 길드를 중심으로 밤베르크의 시민계급이 성장하게 되면서 이들은 주교의 간섭에서 벗어나 뉘른베르크처럼 제국의 도시에서 자유시민이 되고 싶었다. 어느 날 시민계급이 무장을 하고 주교의 공관으로 몰려가면서 무장충돌이 일어났고, 그 과정에서 1387년에 처음 언급됐던 시청건물이 불타버렸다.
불타버린 시청건물을 새로 짓기 위해 주교와 시민계급이 논의를 했지만, 서로 부지를 내놓기를 거부했다. 결국 두 세력이 만나는 레그니츠 강에 인공섬을 만들고 시청을 짓기로 했다. 밤베르크 옛 시청의 위치는 주교의 권한이 미치는 일곱 개의 언덕으로 상징되는 구시가와 레그니츠 강 건너의 시민계급의 거주지 사이의 경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민계급의 힘을 분명히 보여준다.
떡갈나무로 된 말뚝 수백 개를 하천바닥에 박고 자갈, 모래, 흙을 쏟아 부어 기다란 섬을 만들었다. 이렇게 만든 인공섬에 주춧돌을 놓고 건물을 세웠다. 건물의 위쪽과 아래쪽에 다리를 놓아 건물과 강둑을 연결했다. 아래쪽 다리에 쿠니군데 황후의 동상을 세운 것처럼 위쪽 다리의 상류 쪽 난간에는 네포묵 성인의 조각이 서 있고, 반대편 하류 쪽 난간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고난 중인 사람들을 조각한 골비처(Gollwitzer)의 1715년 석조 조각작품 ‘크로이츠그루페(Kreuzgruppe)’가 서있다. 크로이츠그루페는 복원작업 중인지 천막을 둘러놓았다.
고딕양식을 적용한 시청의 건설공사는 1461년에 시작해 1467년 마무리됐다. 현재의 건물은 요한 야콥 미카엘 퀴첼(Johann Jakob Michael Küchel)이 바로크양식과 로코코양식을 절충한 설계로 1744~1756년 사이에 다시 지은 것이다. 위쪽다리 옆으로 붙어있는 반목조 주택은 로트마이스터호이쉔(Rottmeisterhäuschen)이라고 하는 경호원 숙소다.
밤베르크 옛 시청건물에서 눈에 띄는 것은 건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다. 이 그림은 시청을 다시 짓던 1755년, 요한 안반더(Johann Anwander)가 처음 그린 것이다. 그는 건물의 양면에 우화적인 장면과 건축의 세부사항, 당시의 전형이던 환상적인 장면 등을 그려 넣었다. 보호 장치 없이 외부에 노출된 그림이 퇴색하면서 여러 번 복원됐고, 현재의 것은 1959~1962년에 화가 안톤 그라이너(Anton Greiner)가 복원한 것이다.
옛 시청건물 안에는 훌륭한 로코코 홀(Rococo Hall)이 있고, 루트비히(Ludwig) 컬렉션의 고급 도자기들이 전시돼있다. 밤베르크의 루트비히 도자기 컬렉션은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옛 시청 안을 구경하는 일은 일정에 없어 들어가 보지 못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