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베강변에 들어선 드레스덴(Dresden)은 작센주의 수도로 약 550만 명의 주민이 살고 있어, 작센주 안에서는 라이프치히(Leipzig)에 이어 2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은 ‘강변 숲에 사는 사람들’이란 뜻을 가진 고대 소르브어 드레즈다니(Drežďany)에서 유래했다. 더구나 엘베 강변에 조성된 예로부터 내려온 독일 남부의 문화, 정치, 상공업의 중심지다. 특히 문화 수준이 높아 ‘독일의 피렌체’로 불리며, 엘베 강변에 있는 브륄 테라스(Brühlsche Terrasse)는 ‘유럽의 발코니’라 불릴 만큼 뛰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브륄 테라스는 드레스덴의 중심을 흐르는 엘베 강에 걸려 있는 아우구스투스 다리(Augustusbrücke)와 카롤라 다리(Carolabrücke) 사이, 500m 구간의 남쪽 제방 위에 건설됐다. 원래는 슈말칼덴 전쟁(Schmalkaldischer Krieg) 이후에 작센의 선제후 모리츠(Moritz)의 명에 따라 재건된 드레스덴 요새의 일부다. 슈말칼덴 전쟁은 1546년에서 1547년에 걸쳐 가톨릭을 옹호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근황파와, 루터교 제후들의 동맹체인 슈말칼덴 동맹 사이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길이 500m, 너비 20~200m, 최대 높이는 10m에 달하는 이곳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Friedrich August II)의 장관인 하인리히 폰 브륄(Heinrich von Brühl) 백작의 이름을 딴 것이다. 그는 1737년부터 테라스를 비롯하여 갤러리를 겸한 궁전, 도서관 그리고 정원 등을 건설했다.
브륄 테라스 서쪽에 있는 성 광장(Schlossplatz)에서 계단을 올라, 나무를 빼곡하게 심어 조그만 숲을 형상화한 장소를 지나면 조각가 에른스트 리트쉘(Ernst Rietschel)의 흉상이 서 있다. 19세기 초반 드레스덴에서 활약한 그는 독일의 중요한 후기 고전주의 조각가 중 한 사람이다. 요하네스 쉴링(Johannes Schilling)이 제작한 이 흉상은 1876년 2월 21일 리트쉘 사망 15주년을 기념해 제막됐다.
브륄테라스의 서쪽 계단에 붙어 있는 건물은 작센 의사당(Sächsisches Ständehaus)이다. 1901~1907년 사이 브륄의 궁전 등을 철거하고 파울 발로트(Paul Wallot)가 건축한 것으로 작센의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것이 드레스덴 폭격으로 무너졌고, 1950년대에 임시로 재건축됐다가 1996~2001년 사이에 복원됐다. 지금은 드레스덴 고등지방법원과 작센주 유적보존 사무소가 들어있다.
언스트 리트쉘의 흉상을 지나면 고풍스러운 풍미를 간직한 1764년에 설립된 드레스덴 미술학교(Hochschule für Bildende Künste Dresden)가 있다. 브륄테라스에 연한 쿤스트아카데미(Kunstakademie)는 1887~1894년에 콘스탄틴 립시우스(Constantin Lipsius)가 역사주의 양식으로 설계한 4개의 날개를 가진 건물이다.
미술학교 동쪽에 있는 건물이 현대미술관(Albertinum)이다. 1559~1563년에 지은 병기창을 1884~1887년 카를 아돌프 칸즐러(Carl Adolf Canzler)가 르레상스 부흥양식으로 증축해 골동품과 현대 조각 컬렉션을 소장하게 됐다. 건물의 이름은 당시 작센왕국의 알베르트 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드레스덴 지역은 기원전 7500년경 신석기 시대 무렵 선형 도자기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정착한 흔적이 있다. 이 지역에 슬라브인들이 유입된 것은 6세기 초 무렵이다.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 아시아에서 이동해온 훈족의 압박에 밀려 서쪽으로 이동해가는 게르만족의 뒤를 따라 이동해간 것이다. 이 지역에 슬라브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는 이유이다. 슬라브족은 민족성에 따라 세력을 모아 왕국을 성립하지 못하고 부족 단위로 모여 살았다.
9세기 무렵 체코와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해 성립한 대 모라비아왕국(830~906년)이 동유럽 최초의 슬라브계 왕국이다. 이어서 10세기 무렵에는 폴란드왕국이 성립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동유럽에 터를 잡고 있던 슬라브족들은 동진해오는 게르만족과 대치하게 됐다. 드레스덴 역시 1200년 이전에 게르만사람들이 들어와 성을 구축하고 1206년에는 도시의 틀을 갖췄다.
마이센(Meissen) 변경백 디트리히 1세(Dietrich I)가 드레스덴에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1221년 하인리히 3세가 변경백이 된 이후에 드레스덴이 수도가 됐으며, 1288년 그가 죽은 뒤 보헤미아, 브란덴부르크 령으로 전전하다가 1316년 베틴(Wettin) 가문에 의해 다시 마이센 변경백 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385년에는 작센의 공작 령이 됐고, 1547년에는 선거후가 됐다. 1697년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세는 폴란드왕국의 왕이 됐다.
그의 뒤를 이은 아우구스투스 2세 시절에는 드레스덴에 있는 대부분의 바로크풍의 기념비적 건물들이 세워졌다. 즈빙거(Zwinger) 왕궁, 일본 궁전(Japanisches Palais), 타쉔베르크 궁전(Taschenbergpalais), 필니츠(Pillnitz) 성을 비롯해 독일 가톨릭 호프교회(Katholische Hofkirche)라고 하는 드레스덴 대성당과 루터교회인 성모교회(Frauenkirche) 등 2개의 교회와 박물관 등이다.
7년 전쟁(1756~1763) 기간 중에 프러시아 군에 의해 점령당하고, 특히 1760년에는 프로이센 군의 포위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1806년에서 1918년 사이에는 작센 왕국의 수도였다. 20세기에 드레스덴은 127개의 공장과 주요 산업체가 있는 통신과 제조업의 중심이었다. 도시의 이런 배경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연합군의 공격목표가 됐던 것이다.
1945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영국의 왕립공군과 미국 육군항공대 소속의 랭카스터 폭격기 773대가 드레스덴으로 출격해, 소이탄 1181.5톤과 고성능 폭탄 1477.7톤을 퍼부었다. 그 결과 드레스덴의 도심은 크게 파괴되고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나치는 20만 명이 죽었다고 선전했지만, 13명의 저명한 독일역사가들로 구성된 드레스덴 역사가위원회가 5년간의 연구 끝에 2010년에 발표한 보고서에는 사상자가 1만8000~2만5000명이라고 결론 내렸다.
뉘른베르크의 지하동굴을 이야기하면서 소개했던 미국 소설가 커트 보네거트(Kurt Vonnegut)의 ‘제5도살장(Slaughterhouse-Five)’은 저자가 직접 경험한 드레스덴 폭격의 참상을 바탕으로 쓴 공상과학 반전소설이다. 보네거트는 벨기에의 아르덴 숲을 중심으로 벌어진 벌지 전투에서 포로가 돼 드레스덴으로 이송됐던 것이다. 폭격이 있던 순간 보네거트와 동료 수감자는 제5도살장의 지하실에 수용됐던 덕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보네거트가 겪은 일을 담고 있어 반자전적 소설이라고도 하는 이 소설의 주인공 빌리 필그램(Billy Pilgrim)은 벌지 전투에서 포로가 돼 드레스덴으로 이송, 수감됐다가 드레스덴 폭격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전역을 했지만 외상 후 증후군을 앓게 되는데, 1968년 비행기 사고로 뇌수술을 받게 된다. 이때부터 빌리는 자신이 ‘트랄파마도어(Tralfamadore)’ 행성으로 납치돼 그곳 동물원에 알몸으로 전시됐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드레스덴에서의 경험과 트랄파마도어 행성으로 납치됐다고 믿는 상황을 순간이동과 시간여행과 엮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드레스덴의 구시가에 도착한 것은 3시 반경이다. 드레스덴에서의 첫 일정은 드레스덴 성(Dresdner Schloss) 혹은 드레스덴 왕궁(Dresdner Residenzschloss)에 들어있는 보석박물관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드레스덴 성은 베틴(Wettin) 가문의 알베르트(Albert)계로 이어진 작센 선제후(1547~1806)와 작센 왕국의 왕(1806~1918)이 살던 곳이다.
1200년 무렵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을 지은 것을 시작으로, 가장 오래된 하우스만스투름(Hausmannsturm)은 15세기 초에 세워졌다. 1468년부터 1480년까지, 건축가 아놀드 폰 베스트팔렌(Arnold von Westfalen)이 건축한 4개의 날개가 추가됐고, 16세기 중반에는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이 추가됐다. 1701년에 큰 불이 난 뒤에 강건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1 세 (Friedrich Augustus I)는 피해를 입은 건물들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하기 시작했다. 1723/1726년에 은실, 문장실 등이 건축됐고, 1727~1729년에는 벽난로의 방, 보석실, 상아실, 청동실 등이 완성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있었던 드레스덴 폭격으로 지붕이 날아가고 벽도 무너졌지만, 소장품은 전쟁 초에 쾨니히슈타인 요새에 옮겨놓았기 때문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1960년부터 복원이 시작돼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현재 드레스덴 성에는 역사적 녹색금고(Historischen Grünen Gewölbe), 새로운 녹색금고(Neuen Grünen Gewölbe), 동판화 별실(Kupferstich-Kabinett), 주화진열실(Münzkabinett), 그리고 병기고(Rüstkammer) 등 5개의 박물관이 있다.
역사적 녹색금고는 르네상스 양식과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녹색의 궁륭형 객실에 위치한다. 중세와 초기 르네상스 미술품과 그릇, 금은 세공품, 청동조각 등 3000개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새로운 녹색 금고에는 16세기 이후의 보석류와 그릇 등 1100개의 유물이 들어있다.
동판화 별실에는 그림, 인쇄물, 사진 등을 전시한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렘브란트(Rembrandt), 미켈란젤로(Michelangelo),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그리고 피카소(Picasso)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주화 진열실에는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30만 개의 동전, 메달, 장식, 유가증권, 지폐, 스탬프를 비롯해 동전으로 작동하는 장치도 있다.
병기고에는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역사적인 무기, 의복, 갑옷 및 초상화 등 1만개의 유물들이 소장돼있다. 750㎡ 크기의 별실로 된 터키 병기고에는 600건의 오스만투르크의 병기를 소장하고 있다. 터키 병기고는 터키 밖에 있는 오스만 유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컬렉션이다.
드레스덴 성과 교통박물관을 연결하는 외양간 마당의 외벽에는 유명한 왕자의 행렬(Fürstenzug)이 있다. 왕자의 행렬은 베틴 가문에 의한 작센 왕조의 8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1871~1876년 사이에 빌헬름 발터(Wilhelm Walther)가 역대 작센 지방의 제후와 왕을 그렸다.
가장 왼쪽에 12세기에 마이센 변경백을 지낸 콘라드를 선두로 하고, 오른쪽 끝의 20세기에 작센을 다스렸던 게오르그 왕까지 35명의 인물을 담았다. 제후와 왕들 이외에도 59명의 과학자, 예술가, 장인, 어린이 그리고 농부가 있다. 어린이 가운데 있는 소녀 한 명이 유일한 여성이다.
왕자의 행렬이 그려진 외벽에는 1589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가 있었다. 빌헬름 발트의 왕자의 행렬이 풍상에 퇴색하기 시작하면서 이를 보강하기 위해 1904~1907년 사이에 20.5×20.5㎝ 크기의 마이센 도자기로 대체됐다. 왕자의 행렬은 길이 101.9m, 높이 10.5m이며, 행렬 위에 18개의 창이 있기 때문에 타일이 차지하는 부분은 968㎡로, 약 2만3000개의 타일이 사용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