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정부가 한국을 ‘화이트 리스트’에서 제외하면서 국내 산업계가 긴장하고 있다. 1100여개에 이르는 품목들이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면서 특히 반도체와 중소제조업 등 업체에서는 비상대책 마련을 강구하고 있다.
2일 일본 정부는 아베신조 총리 주재로 열린 각의(국무회의)에서 한국을 수출절차 간소화 혜택 국가인 ‘화이트리스트’ 명단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달 1일 고순도불화수소등 반도체·디스플레이 소재 3개 품목의 한국 수출규제 강화를 발표하면서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함께 고시한 바 있다.
이 개정안은 주무 부처 수장인 세코 히로시게경제산업상이 서명하고 아베 총리가 연서한 뒤 공포 절차를 거쳐 그 시점으로부터 21일 후 시행된다. 일각에서는 오는 5일 공포된 후 21일 뒤인 26일 시행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백색국가는 우방국이 군사 전용이 가능한 전략물자를 수입할 경우 자국 기업의 수출허가 절차를 간소화 하는 제도다. 한 번 수출 허가를 받으면 3년간 개별 품목에 대한 심사를 면제 받을 수 있다. 백색국가에서 제외되면 수출시 개별품목 건 마다 허가를 받아야 한다.
현재 미국과 영국, 호주 등 일본이 우방국으로 판단한 27개국이 속해있으며 우리나라는 2004년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백색국가 리스트에 포함됐었다.
이번 조치로 1100여개 달하는 품목의 수출 규제가 현실이 됐다. 반도체와 2차전지 소재, 자동차 부품 등 우리나라 제조업의 근간과 미래 먹거리로 꼽히는 소재 부품의 조달이 어려워지게 된다. 일본 현지 기업들은 식품·목재 등을 제외한 거의 모든 품목을 계약 건별로 허가를 받아야만 한국 수출이 가능하다.
가장 타격이 클 것으로 여겨지는 주요 품목은 반도체웨이퍼와 공작기계, 탄소섬유 등이 꼽히고 있다. 실제로 무역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반도체웨이퍼 또는 소자의 측정용’ 품목의 대일본 수입 의존도는 67.5%에 달했다.
이밖에 ‘평판디스플레이 제조용 기계’의 일본산 수입 비중은 82.8%, ‘반도체 디바이스, 전자직접회로 조립용 기계’의 일본산 비중도 52.1%로 절반 이상이다. 이들 품목은 일본으로부터 공급이 중단되면 대체재나 다른 수입선을 찾기 어려운 한국 산업의 ‘약점’이다.
일본 정부는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통상 절차에 따라 허가해 준다는 입장이지만, 작위적인 판단을 통해 ‘군사전용 우려’를 이유로 불허할 수 있는 만큼 사실상 거래 통로가 막혔다는 분석이다.
국내 산업계에서는 처한 상황에 따라 우선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다. 특히 반도체 부분은 수개월치 물량을 미리 확보한 덕분에 산업 시계가 당장 올스톱 되진 않을 전망이지만, 재고 물량을 소진한 이후가 문제다. 이르면 3개월 후부터 생산에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있다.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인 반도체·디스플레이 업종은 수출규제 영향을 그대로 받게 된다. 앞서 수출규제 대상이 된 3개 품목은 반도체 공정 핵심 소재로 일본산 수입 비중이 90% 이상일 만큼 대일 의존도가 높다.
지난달 4일 일본이 수출규제를 적용한 반도체 핵심소재 3개(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품목은 현재까지 단 한 건도 수출 허가를 받지 못했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업계는 일본산 부품의 수개월 치 재고를 확보하는 등 컨틴전시 플랜(비상경영계획)을 가동 중이다.
일본의 대한 수출규제와 관련, 중소기업계의 피해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당장은 피해를 우려할만한 수준에 이른 기업들은 많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최근 수출기업들을 대상으로 1차 조사를 한데 이어 다음주 이후 긴급조사를 수시로 실시해 사태추이를 살펴볼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지난달 15일부터 일본 수출규제 애로신고센터를 전국 12개 지방청에 설치했다.
다만 일본의 무역규제가 본격화될 경우 대기업의 피해에 따른 연쇄 충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 화이트리스트 제외 품목이 늘어날 경우 중소 제조업 전반의 크고 작은 악영향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대기업의 위탁을 받아 물품을 제조하는 수탁 중소제조업체의 비율은 70%가 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소재·부품 국산화를 위한 연구개발과 생산, 마케팅, 공급에 이르는 일목요연한 체계를 만들어, 중소기업이 국산화 개발에 성공하면 이를 구매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국내 자동차 업계는 일본 부품 의존도를 꾸준히 낮춰온 만큼 당장은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인한 타격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부품업체 단체인 한국자동차산업협동조합은 관계자는 “회원사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본에서 수입하는 부품과 소재를 대체할 수 있는 등 부정적 영향은 제한적일 것으로 파악했다”고 말했다.
KB증권은 올해 들어 5월까지 일본산 부품 수입액은 3억1000만 달러로 국내 자동차 생산(163억달러) 대비 1.9%에 그쳤다며 당분간 큰 영향은 없을 것으로 진단했다.
완성차업체들은 국산화율이 95% 이상이며 일본 이외 국가에서 부품을 조달할 수 있어 단기적 대응보다 장기적 관점에서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다. 또한 내연기관보다 전기차의 배터리, 수소전기차의 수소탱크 등 친환경차 위주로 일본산 소재 문제의 대응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한편 이날 문재인 대통령은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거부하고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대단히 무모한 결정으로, 깊은 유감을 표한다”면서 “우리 정부와 국제사회의 외교적 해결 노력을 외면하고 상황을 악화시켜온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는 것이 명확해진 이상, 앞으로 벌어질 사태의 책임도 전적으로 일본 정부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경고한다”며 전면전을 예고했다.
조현우, 배성은, 임중권 기자 akgn@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