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서른다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8-26 06:00:00

생각해보니 브란덴부르크 문은 벌써 3번째 방문이다. 15년 전에 WHO 전문가회의에 참석한 길에, 그 몇 년 뒤에는 독일, 영국, 프랑스 등 3개국의 전염병관리 부서를 방문하는 길에 잠시 짬을 내 구경한 적이 있다. 이날은 파리광장이 북적일 정도로 브란덴부르크 문을 찾은 사람이 많아 보안에 신경을 많이 써야 했다. 브란덴부르크 문 가까이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고 있었는데, 그 앞에 모여 춤을 추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거리낌 없이 춤을 출 수 있는 젊음이 부럽다.

파리광장에서 브란덴부르크 문을 바라보면 가운데 통로를 통하여 멀리 보이는 첨탑이 티어가르텐 가운데 있는 베를린 전승탑이다. 베를린 전승탑(Berliner Siegessäule)은 덴마크와 프로이센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864년 하인리히 스트랙(Heinrich Strack)에게 설계를 맡긴 기념비다. 

전승탑이 완공된 1873년까지 이어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1866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고, 통일된 독일제국이 성립됐기 때문인지 프리드리히 드레이크(Friedrich Drake)는 8.3m 높이에 무게가 35톤에 이르는 승리의 여신, ‘니케’의 상을 전승탑 위에 얹었다.

니케는 오른손에 월계관을, 왼손에는 군기가 달린 철십자를 쥐고 있다. 그녀가 쓰고 있는 독수리모자는 그녀를 프로이센을 상징하는 여인, 보루시아(Borussia)임을 나타낸다. 베를린 사람들은 황금빛 리즈(Golden Lizzy)라는 의미의 골델저(Goldelse)라고 부른다. 독일 작가 마를리트(E Marlit)의 소설 ‘Goldelse’에서 유래한 것이다.

전승탑은 광택을 낸 붉은색 화강암으로 쌓은 받침대 위에 독일 북부의 뷔케베르크(Bücjeberg)의 오베른키르헨(Obernkirchen) 마을에서 캔 사암으로 만든 4개의 원주를 올렸다. 원주는 위로 가면서 반경이 좁아진다. 50.66m 높이의 원주 안에 있는 나선형으로 만든 285계단을 통해 전망대에 오를 수 있게 했다. 전망대에서는 가까이 있는 티어가르텐에서 브란덴부르크 문, 멀리는 포츠담 광장까지 조망할 수 있다. 

전승탑은 쾨니히스플라츠(Königsplatz)에 처음 세워졌었다. 그런데 나치가 집권했을 때, 베를린이 세계의 수도라는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1939년에 전승탑을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이전하는 과정에서 받침대를 6.5m 넓혔고, 기둥의 길이를 7.5m 더 늘려 현재의 전승탑 높이는 기저에서 니케상까지 67m에 달하게 됐다. 그로서 스테른은 티어가르텐의 중심부에 동서 도로를 축으로 남북을 연결하는 3개의 도로가 모여 5개의 꼭지를 만들어 별모양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버스가 전승탑이 있는 그로서 스테른을 여러 차례 돌아갔는데, 슈프레 강 쪽으로 향하는 2개의 도로 사이에 동상과 석상이 하나씩 서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 가까운 석상은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그라프 폰 몰트케(Helmuth Karl Bernhard Graf von Moltke) 장군이고, 먼 쪽의 동상은 알브레히트 테오도르 데밀 그라프 폰 루온(Albrecht Theodor Emil Graf von Roon) 장군이다. 

헬무트 몰트케 장군은 독일의 통일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승리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알브레히트 루온 장군은 프로이센의 전쟁부장관을 지내면서 비스마르크와 헬부트 몰트케 등과 함께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과의 일련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버스를 타고가다 보면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동상과 석상 사이에 난 길을 따라 숲으로 더 들어가면 비스마르크의 동상이 서있다. 

티어가르텐은 베를린의 중심에 있는 도심공원으로 넓이가 210ha(헥타르)에 달한다. 독일에서 티어가르텐보다 더 큰 도심공원으로는 옛날 베를린의 템펠호프 공항자리에 조성된 템펠호퍼(Tempelhofer) 공원과 뮌헨에 있는 영국 공원(Englischer Garten)뿐이다. 티어가르텐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의 사냥터로 사용하기 위해 1527년에 설립됐다. 쾰른(Cölln)시의 성벽 서쪽을 차지하는 공간이었다. 

공원 부근에 도시 궁전(Stadtschloss)이 있다. 1530년부터 추가로 땅을 구입해 확장했는데, 현재의 티어가르텐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규모다. 야생동물들을 들여다 이곳에 풀어놓았는데, 동물들이 밖으로 탈출할 수 없도록 외부와 차단돼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베를린시가 확장됨에 따라 사냥터가 줄어들면서 훗날의 선제후들은 이곳에서의 사냥에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18세기 들어 티어가르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도시궁전과 티어가르텐을 연결하는 도로, 운터 덴 린덴(Unter den Linden, ‘보리수 아래’라는 의미)을 확장했고, 티어가르텐의 중앙광장인 그로세 스테른과 선제후 광장(Kurfürstenplatz)으로 모이는 도로를 각각 7개, 8개씩 새로 만들었다. 

뒤이어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티어가르텐의 울타리를 제거하여 사냥터를 베를린 시민들에게 개방했다. 시민들의 유원지(Lustgarten)가 된 것이다. 선제후의 지시에 따라 건축가 게오르그 벤제슬라우스 폰 크노벨스도르프(Georg Wenzeslaus von Knobelsdorff)는 당시 유행하던 바로크 양식으로 된 미로, 물동이가 있는 연못, 화단 등을 설치했다. 또한 예술성이 뛰어난 조각들을 세웠다. 

히틀러의 나치당이 집권하면서 티어가르텐이 베를린의 중심이 됐지만,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많은 조각상이 파괴됐다. 전쟁이 끝난 뒤에 티어가르텐은 영국이 관할하는 구역이 되며 공원의 황폐화가 가속됐다. 우거진 숲은 대부분 베어져 땔감으로 사용됐다. 전쟁 전에 있던 수십만 그루의 나무 가운데 겨우 700그루만이 살아남았다. 또한 영국군은 숲을 개간해 임시 농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베를린의 행정관은 티어가르텐의 복구를 결정했고, 1949년 복구의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나무로 보리수를 심었다. 서독 전역에서 25만 그루의 어린나무들이 티어가르텐으로 옮겨졌다. 독일이 통일된 뒤로 티어가르텐 외곽에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베를린에 있다가 방치된 독일주대 각국 대사관이 새로 건설되고, 티어가르텐을 둘러싼 도로망에도 변화가 생겼다. 새로운 기념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파리광장 너머로 멀리 보이는 탑은 베를린 텔레비전 송신탑(Berliner Fernsehturm)이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시절인 1965~1969년에 건설된 368m 높이의 이 탑은 당시 세계에서 2번째로 높은 텔레비전 송신탑이었다. 지금도 독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유럽에서는 4번째로 높은 텔레비전 송신탑이다. 

슈프레 강변의 고르지 않은 모래땅에 탑을 세워야 했기 때문에 외경 42m의 기초를 2.7~5.8m 깊이로 다진 위에 한 변이 4.7m에 높이가 230m에 달하는 강철로 만든 탑축을 세웠다. 탑축의 무게는 390톤. 그 안에는 3대의 엘리베이터와 986개로 된 비상계단이 들어갔다. 콘크리트를 타설해 만든 탑의 전체 무게는 2만6000톤이고, 그 위에 직경 32m에 무게가 4800톤이나 하는 타워볼을 올렸다.

전망대는 203.78m, 레스토랑은 207.53m의 높이에 있다. 지상 6m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갈 수 있다. 타워볼 3층, 직경 29m의 공간에 있는 텔레카페(Telecafé)라는 이름의 레스토랑에는 200명이 동시에 이용할 수 있는 40개의 식탁이 있다. 텔레카페의 중심은 고정돼있지만, 바깥 부분은 1시간에 걸쳐 시계방향으로 360도 회전하게 돼있다.

1시간이 지나면 손님은 좌석을 비워야한다. 15년 전에 베를린에 갔을 때 일본에서 온 참가자와 함께 전망대까지 올라가 베를린 시내를 굽어본 적이 있다. 오래된 기억이라 분명치는 않지만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브란덴부르크 문과 슈프레 강 사이에는 독일의회, 혹은 국가의회의사당이라고 하는 라이히스탁스게보이데(Reichstagsgebäude) 건물이 있다. 베를린에 있는 독일의회는 포츠담 광장을 지나는 라이프치거 슈트라세(der Leipziger Straße) 4번지에 있는 건물에서 출발했다. 1867년 프로이센이 지배하던 북독일연합의 의회가 이곳에 있었다. 

1871년 독일제국이 성립된 다음에는 라이프치거 슈트라세 75번지에 있던 프로이센 대법원 건물로 옮겨갔다. 하지만 장소가 너무 협소했기 때문에 새로운 국회의사당 건립을 의결하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의 파울 발로트(Paul Wallot)의 설계에 따라 티어가르텐의 북동쪽에 있던 공화국광장에 건설을 시작할 수 있었다.

발로트는 당시 정부청사에 관행처럼 적용되던 역사주의 양식을 바탕으로 외관은 신르네상스 양식에 독일 르네상스 양식과 신바로크 양식을 결합해 설계했다. 당시로서는 최첨단이라 할 철강을 사용하며 유리로 된 돔을 얹기로 했다. 1884년 착공해 1994년에 완공한 제국의사당은 독일제국의 국가적 자존심이 강하게 표현된 건축이다. 

제국의사당은 제국을 이은 바이마르공화국 시절에도 의사당으로 사용됐다. 1933년 공산당원의 방화로 본회의장이 불타는 바람에 유리돔을 철거하게 됐고,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소련의 폭격으로 크게 부서졌다. 1961~1973년 사이에 파울 바움가르텐에 의해 복원을 시도했지만, 유리돔을 포기하고 모서리 탑도 원래 높이보다 낮았으며 장식들도 많이 떨어져나간 상태로 마무리됐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된 다음 독일의회의 재건이 논의됐고, 국제공모를 통해 영국의 포스터(Foster) 등과 네덜란드의 피 드 브루인(Pi de Bruijn) 그리고 스페인의 산티아고 칼라트라바(Santiago Calatrava) 등의 제안으로 결정됐다. 포스터의 최초 설계에서 빠졌던 유리돔을 포함하는 등의 수정을 거쳐 1995년 복원공사가 시작돼 1999년 완료됐고, 1999년 4월 19일 통일 독일연방하원 회의가 열렸다.

복원된 유리돔은 24m높이의 지붕 위에 얹혀졌다. 돔의 직경은 38m, 높이는 23.5m이다. 강철로 된 뼈대는 수직방향으로는 15도 간격으로 24개를 세우고, 수평방향으로는 1.65m 간격으로 17개를 엮었다. 강철 뼈대의 무게는 약 800톤에 이르며, 여기에 총 3000m² 넓이의 유리를 덮었는데, 유리의 무게는 약 240톤에 달한다. 돔 내부에는 폭이 약 1.8m, 오프셋이 180도인 2개의 나선형 램프가 각각 길이 230m, 지상과의 높이 40m인 전망대를 이룬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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