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마지막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독일, 마지막 서른아홉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19-09-13 18:00:00

독일여정의 마지막 날이다. 이날은 7시20분에 베를린을 떠나 프랑크푸르트로 가는 이체에(ICE)를 타야 했기 때문에 6시20분에 숙소를 나섰다. 베를린 중앙역에 도착해서는 시간이 남았다. 기차역을 구경하다가 플랫폼에 내려갔는데, 출발 7분을 남기고 플랫폼이 바뀌었다고 다른 플랫폼으로 급하게 이동하는 비상상황이 벌어졌다. 

숨이 턱에 차서 기차에 올라보니 6명이 하나의 객실을 쓰도록 돼있다. 우리가 들어갔을 때 다른 일행 4명이 먼저 객실에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보니 가방을 올려놓을 공간이 없어서 일반객실에 따로 둬야했다. 뿐만 아니라 창가로 배정받은 아내와 내 자리는 일행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었다. 좌석이 지정된 표였는데 일행이라는 이유로 무시한 것 같아 기분이 나빴다.

독일철도가 1991년부터 운영하는 도시 간 초고속열차(InterCityExpress)를 이체에(ICE)라고 부른다. 독일의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며 유럽 주요도시를 운행하는 유로시티도 있다. 최고시속 300㎞까지 낼 수 있다. 1998년 에세데역에서 대형사고가 발생했지만, 사고의 원인으로 밝혀진 차체결함을 보완한 뒤로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고속철도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우리나라가 KTX를 도입할 당시 프랑스의 테제베와 경합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인지 여러 모로 관찰을 하게 됐는데, 별도 객실을 두고 있는 점은 좋았지만, 통로에 자리한 승객은 차창 밖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이 있었다. 승차감 역시 다소 떨어지지 않나 싶었다. 

베를린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는 약 500㎞인데 열차로 4시간 반 정도 걸린다니, 시속 100㎞ 정도에 불과한 듯하다. 그렇다면 이체에(ICE)가 아니라 우리나라 ITX나 새마을호에 해당하는 이체(IC, InterCity)가 아닐까 싶었는데, 이체로 가면 5시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베를린을 출발하고 1시간여 만에 라이프치히에 정차했다. 기차가 다시 출발하는데 보니 차량의 진행방향이 달라졌다. 구글지도를 열어보니 베를린ㅡ라이프치히ㅡ프랑크푸르트를 잇는 선이 갈매기 날개를 닮았다. 열차 주변풍경은 별다른 변화가 없는데 그래도 가끔은 터널도 지난다. 높은 산이 있어서는 아니고 낮은 구릉을 터널로 지나는 것이다. 우리나라 같으면 절개해서 철로를 깔았음직하다.

줄여서 프랑크푸르트라고 부르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Frankfurt am Main)은 독일 중서부 헤센주의 라인 강 지류인 마인 강 연안에 있다. 브란덴부르크주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Frankfurt an der Oder)와 헷갈릴 수도 있다. 2017년 기준으로 74만6878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는 헤센주에서 가장 크며, 독일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다. 앞에는 베를린, 함부르크, 뮌헨, 쾰른이 있다. 

독일의 행정수도는 베를린이지만, 경제수도는 프랑크푸르트라고 할 만큼 독일 경제의 중심을 차지한다. 도시에는 유럽 중앙은행이 있으며, 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도 있어 영국의 런던과 함께 유럽의 금융 중심지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프랑크푸르트라는 도시이름과 관련해 서기 794년에 작성된 문서에 고대 독일어로 프랑코노부르드(Frankonovurd) 또는 라틴어로 바둠 프랑코룸(Vadum Francorum)이 처음 기록됐다. 이 지명이 중세 시대에는 프랑켄포르트(Frankenfort)로, 현대에는 프랑크포르트(Franckfort)와 프랑크푸르트(Franckfurth)로 변형됐다. 

서기 146년 무렵 주나(Zuna)라는 프랑크 왕이 당시 시캄브리(Sicambri)라고 하던 지방을 통치했는데, 그는 프랑코노푸르트(Franconofurd)라는 프랑크계 게르만부족에 속했다. 푸르트(Furt)는 영어의 포드(ford)에 해당하는 독일어로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을 의미한다. 

1세기 무렵 뢰머(Römer) 지역에 로마 정착촌이 생겼고, 북쪽의 헤던하임(Heddernheim)의 니다(Nida)가 수도였을 것이다. 이후에 게르만혈통의 알레만니(Alemanni)와 프랑크(Franks) 부족이 들어와 살게 됐고, 샤를마뉴대제가 794년까지 통치했다. 프랑크푸르트는 신성로마제국에서도 중요한 도시였다. 

855년부터 독일왕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아헨에서 즉위했지만, 1562년 막시밀리안 2세가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에 즉위한 이래 1792년 프란츠 2세가 즉위할 때까지 전통이 이어졌다. 1372년 프랑크푸르트는 제국 자유도시(Reichsstadt)가 됐다. 프랑스혁명 이후에 여러 차례 프랑스군에 점령됐지만,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붕괴될 때까지 자유도시로 남아있었다. 

1806년에는 라인강 연맹의 중심이던 아샤펜부르크(Aschaffenburg)의 공국이 됐다. 나폴레옹이 실각한 뒤 열린 비엔나 의회(1814~1815)에서 대공국이 해산됐고, 프랑크푸르트는 완전한 주권을 가진 도시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1866년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전쟁 이후 프랑크푸르트는 독립성을 잃고, 프로이센의 헤세나소주에 편입됐다.

열차는 정시에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했다. 열차에서 내리고 보니 후끈하다. 아침에 베를린을 떠날 때는 14℃로 쌀쌀한 느낌이었는데, 정오 무렵에는 화창한 날씨에 29℃까지 올랐다. 일교차가 심하다. 점심을 먹고는 1시 반경에 뢰머 광장(Römerberg)에 도착하다.

뢰머 광장으로 건너가기 전에 바오로교회(Paulskirche)를 먼저 만난다. 오늘날 캐서린 성녀교회(Katharinenkirche)로 사용되는 이 교회는 1786년에 철거된 중세의 맨발의 수도사교회(Barfüßerkirche) 자리에 1789~1833년 사이에 지어져 1944년까지 프랑크푸르트 개신교회로 이용됐다. 

맨발의 수도사 혹은 프란체스코 수도원에 대한 기록이 1270년 문서에 기록돼있는 것으로 보아 12세기 초반에 이미 존재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수도원교회는 1350년 고딕양식으로 처음 세워져 16세기 초반까지 조금씩 확장됐다. 하지만 18세기에 이르러 교회가 협소해지면서 교회가 낙후되기 시작했다. 1782년 마지막 예배가 있은 뒤로 폐쇄됐다가 1786~1787년 사이에 철거됐다. 

지금의 교회는 서쪽에 돔과 타워가 있는 타원형 홀 양식을 제안한 프랑크푸르트 건축가 요한 안드레아스 리브하르트(Johann Andreas Liebhardt)의 설계를 수정해 1789년 건축이 시작됐지만, 자금조달에 어려움이 있어 지연된 끝에 1833년에야 완공됐다. 바오로교회는 긴지름이 약 40m, 짧은 지름이 약 30m인 타원의 평면을 한 3층 건물이다. 처마까지의 높이는 28m다.

1848년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의회가 교회건물을 사용하기도 했다. 1856년에 다시 교회로서의 기능을 회복했다. 역시 1944년 폭격으로 무너져 1948년에 재건됐다. 재건 이후 더 이상 교회의 용도로 쓰이지 않고 전시회나 시 혹은 주가 주최하는 행사가 주로 열린다. 뢰머 광장은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의 중심지로 황실대관식과 무역박람회 그리고 크리스마스 시장이 열렸던 곳이다. 

광장의 서쪽으로는 프랑크푸르트 시청이 있고, 남쪽에는 프랑크푸르트 어린이박물관(Junges Museum Frankfurt)과 역사박물관(Historisches Museum Frankfurt)이 있다. 서쪽에는 쉬른 쿤스트할레 프랑크푸르트(Schirn Kunsthalle Frankfurt) 미술관이 있다. 이 미술관은 1986년 개관 이래, 비엔나 아르누보, 표현주의, 다다 와 초현실주의, 독일 팝, 쇼핑 예술과 소비, 시각 예술 등 다양한 전시회가 열렸다. 소장품은 내세울게 크게 없다. 동쪽으로 조금 가면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이 있다. 

뢰머 광장 서쪽에 있는 계단식 박공이 독특한 3채의 건물이 시청이다. 상인이던 뢰머(Römer) 가문의 집이었던 것을 시에서 사들여 1405년부터 시청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뢰머는 황금백조(Goldener Schwan)라는 이름의 건물과 함께 시의회에 뢰머 건물을 양도했는데, 시의회가 5세기에 걸쳐 11채의 집을 사들여 시청을 확대해 매우 복잡한 구조가 되고 말았다. 

1944년 3월 22일 밤, 연합군의 폭격으로 심하게 파괴됐지만, 전후 간단한 형태로 재건됐다가 1974년과 2005년 2차례에 걸쳐 복원됐다. 가운데 뢰머 하우스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알트 림푸르크(Alt-Limpurg), 오른쪽에는 뢰벤스타인(Löwenstein) 건물이다. 전체가 3층인 시청 단지는 약 1만㎡에 달하며 6개의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 9개의 집으로 구성돼있다. 

뢰머하우스의 전면에는 4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2개의 도시문장, 시계 문자판과 건물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설명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4명의 황제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처음 선출된 황제 프리드리히 바바로사(Friedrich Barbarossa), 도시에 대한 협약권을 부여하고 도시 확장을 허용한 바이에른 루드비히(Ludwig der Bayer),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선출투표를 하도록 한 카를 4세(Karl IV),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처음으로 즉위식을 거행한 막시밀리안 2세(Maximilian II)다. 

뢰머 광장을 지나 프랑크푸르트 대성당(Kaiserdom St. Bartholomäus)을 찾아갔다. 교회의 규모는 상당했지만 내부의 치장은 소박한 느낌을 줬다. 아쉬운 점이라면 보수작업을 하고 있어 본 모습을 감상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현장에서는 다른 한국인 여행팀도 가이드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었다.

지금의 교회 건물은 같은 부지에 있는 4번째 교회다. 19세기 후반의 발굴조사에서 7세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건물들이 드러났다. 1239년에 교회는 성 바르톨로메오(St. Bartholomew)에게 봉헌됐으며, 14세기와 15세기에 메로빙거 시대의 초기 교회를 기반으로 2번째 교회를 지었다. 1867년 화재로 파괴돼 지금 모습으로 재건됐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1950년대에 같은 모습으로 재건됐다. 첨탑의 높이는 95m다. 고딕 양식의 로마가톨릭교회의 모습이며 이름 역시 성당이라고 부르지만, 지금은 가톨릭과 루터교가 같이 사용하고 있어 진정한 성당이라고 할 수는 없다. 1356년부터 로마교회의 교황이 독일의 왕을 이 교회에서 임명했고, 1562년부터 1792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이곳에서 선출했다.

3시경 뢰머 광장을 떠나 주방용품을 파는 면세점에 들렀다가 공항으로 향했다. 4시반경 공항에 도착해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탑승구에 도착한 시간은 5시 반. 집총을 한 군인들이 수하물을 검색하고 있어 다소 살벌한 분위기였지만 나름 친절했다. 비행기는 거의 정시에 탑승구를 물러나 인천으로 향했다. 

옆자리에 몸집이 나가는 친구가 앉아 불편했는데, 비행 내내 요란하게 코를 고는 바람에 고역이었다. 다른 쪽 승객은 아예 자리를 옮겨버렸다. 비행은 순조로웠지만 도착 예정시간보다 조금 늦게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탑승트랙으로 내리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훅하고 느껴졌다. 20℃ 전후였던 독일에서 34℃나 되는 서울로 이동했으니 시차에 더해 심한 공간 차에 적응해야 할 판이었다.

한편, 독일을 여행할 때는 소소한 것 같았지만, 막상 정리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배운 것도 많았다. 덕분에 연재횟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아졌다. 이것으로 독일 여행을 마무리한다. 다음에는 지난 해 가을에 갔던 그리스 여행을 뒤로 미루고, 이번 여름에 다녀왔던 발트연안국 여행을 소개하려 한다. 작센의 선제후가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의 왕을 지낸 적도 있어 연관성을 더 공부해볼 생각이다. (끝)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19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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