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을 나와 동북쪽으로 난 도로를 따라가다가 만나는 삼거리에서 초콜릿 가게가 있는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멀리 교회의 첨탑들이 눈에 들어오고 거리에는 식당들이 내놓은 천막들이 가득 차 있다. 거리에 들어서면서 오른쪽으로 살색 페인트를 곱게 칠한 3층 건물이 바로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업적으로 두 차례의 노벨상을 받은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Maria Skłodowska-Curie) 박물관이다.
신시가지의 프레타(Freta) 거리 16번지에 있는 이 박물관은 마리아 퀴리가 태어난 곳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 독일군이 철거했던 것을 종전 후에 재건했다. 박물관은 폴란드 화학협회가 후원을 하고 있는데, 마리아와 그녀의 남편 피에르 퀴리(Pierre Curie)의 사진과 편지 등의 문서, 그리고 부부의 업적 등이 전시돼있다.
마리아 퀴리는 남학생만 뽑는 바르샤바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기 때문에 프랑스 파리에 유학하여 소르본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에 소르본 대학의 물리학자 피에르 퀴리의 실험실에서 연구를 시작한 그녀는 퀴리와 결혼하게 됐고, 공동연구를 통해 방사성물질인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했다. 하지만 연구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방사성물질에 피폭됐기 때문에 생긴 혈액암으로 67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한편 1933년 대학이 퀴리의 연구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 남부 아르쾨이에 세운 연구소는 1978년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는 지금까지도 연구소에서 나온 핵폐기물을 처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구소 주변에 철조망을 치고 콘크리트 벽을 세우고, 방호복을 입지 않는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감시카메라를 운용하고 있다. 사고를 일으킨 후쿠시마 원전의 핵폐기물을 어물쩍 태평양에 방류하려는 일본 정부가 얼마나 무모한가를 비교할 수 있는 사례다.
‘핵전쟁 방지를 위한 국제의사기구’를 공동창립하고 노벨평화상 후보에 오른 의사 헬렌 칼데콧은 “일본이 방출하겠다고 나선 후쿠시마 방사능 오염수 100만 톤은 태평양과 주변 바다에 심각한 위협을 가져올 것입니다. 일본 정부는 세슘이나 스트론튬 90과 같은 굉장히 위험한 방사성 물질 대부분을 없앴다고 말하지만 이는 거짓말입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참고로 지금까지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사람은 단 4명뿐이다. 마리 퀴리가 라듐과 폴로늄을 발견한 공로로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을 받았으며, 비타민C 다량투여요법을 주창한 것으로 유명한 라이너스 폴링은 화학결합 연구로 1954년 화학상, 지표핵실험을 반대한 공로로 1962년 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미국의 물리학자인 존 바딘은 트랜지스터 개발로 1956년 물리학상, 초전도이론 정립으로 1972년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마지막으로 미국의 화학자 프레데릭 생어는 인슐린의 아미노산 배열 순서를 규명한 공로로 1958년에 화학상을, DNA의 염기서열을 분석하는 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1980년에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들 가운데 단독으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사람은 라이너스 폴링이 유일하다.
그나저나 2차례나 노벨상을 받은 천재과학자의 집은 평범해보였다. 어쩌면 18세기 중산층이 다 이렇게 살았을 것이다. 집 앞 도로에 들어선 카페들이 내놓은 파라솔로 어수선한 카페거리가 된 탓일지도 모르겠다. 카페거리에 교회가 여럿 서있는 모습도 생경하다. 마리아 스크워도프스카-퀴리 박물관 쪽에 바르샤바 히야신스 교회(Kościół Rzymskokatolicki Dominikanów pw. św. Jacka)가 있고, 건너편 교회는 바르샤바 성령교회(Kościół Paulinów pw. św. Ducha i św. Pawła Pustelnika)다.
거리 끝에 있는 독특한 모습의 성문을 통해 구시가로 들어간다. 신시가지와 구시가지의 경계에 세워진 바르샤바 바르바칸(barbakan)이다. 반원형 강화 전초 기지를 의미하는 바르바칸은 우리의 옹성(甕城)에 해당하는 것이다. 구시가의 노보미에스카(Nowomiejska) 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1543년 오래된 성문을 대신해 세웠다. 14세기에 지은 도시 성벽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성벽을 둘러싸고 있는 해자 바닥에서 폭 14m, 높이 15m로 쌓아올리고 외벽에서는 30m 튀어나오도록 했다.
폴란드 마조우제에 살던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가인 베네치아 사람 얀 밥티스트(Jan Baptist)가 설계했다. 하지만 바르바칸이 설치된 이후에 각국이 개발한 대포의 성능이 급속하게 향상되면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없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중, 바르샤바 공성전(1939년)과 1944년 바르샤바 봉기 과정에서 바르바칸은 대부분의 구시가지 건물과 함께 대부분 파괴되었다. 종전 후인 1952~1954년 사이에 재건됐다.
바르바칸에서 잠시 자유시간을 얻은 우리는 바르샤바의 성벽을 돌아봤다. 성벽 밖에는 깊은 해자가 있고, 성벽 안에 다시 성벽을 쌓은 이중구조로 돼있다고는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포병술이 발전하면서 외적의 공성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을까 싶었다. 신시가에서 바르바칸을 통해 들어와 만나는 내성 위의 길을 왼쪽으로 들어서 끝까지 가면 약간 튀어나온 테라스가 있다.
아내와 나는 그곳까지 가서 걸어온 길을 되짚어보면서 외성 밖으로 들어선 집들이 매혹적이라 생각했다. 그리고는 발길을 돌렸는데, 그 테라스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바르샤바의 유래에 관한 전설에 등장하는 어부 바르스(Wars)와 사와(Sawa)의 기념비가 서 있다는 것을 뒤에서야 알게 됐다.
비스와 강에서 고기를 잡던 바르스는 어느 날 강변에서 야생, 삶, 자연의 아름다움에 관한 아름다운 노래를 듣게 됐다. 노래를 부르는 이는 긴 황금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피부는 눈처럼 하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녀를 사랑하게 된 바르스는 그물로 그녀를 잡아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녀는 물을 떠나 살 수 없기 때문에 비스와 강에 놓아 달라 부탁했고, 바르스는 그녀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비스와 강에서 바르스와 아이들을 위해 노래를 불러줬으며, 위험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해줬다는 것이다. 바르샤바의 인어가 덴마크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와 자매간이라는 주장도 있다.
다시 바르바칸으로 돌아와 노보미에스카 거리를 따라 들어가면 구시가 시장광장(Rynek Starego Miasta Warszawa, 리네크 스타레고 미아스타 바르샤바)에 당도한다. 이 광장은 13세기로부터 14세기에 걸쳐 형성됐는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바르샤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춘 도시의 가장 중요한 기능을 수행해왔다.
상업 목적 이외에도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을 때마다 정치 연설이나 선언문이 낭독됐고, 또한 공개 처형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15세기에는 마구간으로 둘러싸인 석조로 된 시청건물이 광장 중앙에 들어섰는데, 1817년에 철거되었다. 4각형 모양의 광장의 네 모퉁이에서는 각각 직각으로 도로가 뻗어나가기 때문에 모두 8개의 도로가 광장에 연결되는 셈이다.
1855년에 헨리크 마르코니(Henryk Marconi)가 설계한 현대적 도시수도체계가 완성되면서 광장 가운데 콘스탄티 헤겔(Konstanty Hegel)이 설계한 인어분수대가 설치됐다. 청동으로 만든 인어는 트리톤과 돌고래 등을 같이 조각했다. 폴란드 민화에 등장하는 메루지나(Meluzyna)의 모습을 닮아, 선형의 뒤틀린 고리를 가진 인어는 물거품에서 솟아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인어가 오른손에 칼을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은 바르샤바를 보호한다는 인어의 전설에 유래한 것이다.
한편 이곳에 있던 시장은 1913년 마리엔쉬타트( Mariensztat)로 이전했다. 그 뒤에는 쇠사슬로 연결된 26개의 돌기둥으로 둘러싸인 팔각형 콘크리트 수영장을 만들고 그 가운데 세운 사암 받침대 위에 인어 동상을 세웠다. 1928년에 인어동상을 철거해 창고에 보관했다가 1951년에는 중앙 문화공원에 다시 설치했다. 1969년 이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인어의 칼이 부러지는 등의 손상을 입어 복원작업을 해야 했다.
결국 2008년에는 사본을 만들어 원래 자리인 구시가 시장광장에 세우고 진품은 역사박물관에 보관했다. 광장에는 각종 기념품 혹은 꽃을 파는 천막과, 식당에서 내놓은 자리들이 뒤섞여 있어 어수선했다. 시장을 이사시켜서 광장을 정비한 효과가 전혀 없는 듯했다. 구 시장광장에서 주목할 점은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모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복원됐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러시아군이 바르샤바에 가까이 왔다는 소식을 듣게 된 바르샤바 시민들이 떨치고 나서 독일군에 저항한 바르샤바 봉기가 있었다. 당시 폴란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가 주도해 1944년 8월 1일 공세를 시작했다. 추축국에 공세를 강화하는 연합군에 힘을 보태고, 소련의 꼭두각시인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보다 우월성을 선점하기 위해서다.
봉기 초반, 저항군은 바르샤바 중심부를 장악하여 해방구로 만드는 등, 성과를 올렸지만, 소련군은 폴란드 저항군과의 접촉을 차단한 채, 바르샤바 인근에서 진격을 멈췄다. 결국 전열을 정비한 독일군과 격렬한 시가전이 벌어진 끝에 저항군은 분쇄되고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바르샤바 봉기에서 폴란드 저항군 1만6000명이 전사하고 6000명이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폴란드 민간인 15만에서 20만명이 죽었다. 독일군은 사망자와 실종자를 합쳐 8000명이 넘었고, 90000명이 부상을 입었다.
시가전이 벌어지면서 바르샤바의 건물의 25%가 파괴됐는데, 독일군은 시가전이 끝난 뒤에 남은 건물의 35%를 추가로 파괴했다. 결국 1939년 독일군이 폴란드에 침공한 이후로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1944년 바르샤바 봉기를 거쳐 1945년 1월 독일군이 폴란드에서 퇴각할 때까지 바르샤바 시의 85%가 파괴되고 말았다.
전후 들어선 폴란드 공산정부는 폐허가 된 바르샤바 시를 전쟁 전의 모습으로 되돌리기 위한 복원사업을 추진했다. 그들은 무너진 건축물의 설계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있는 사진 혹은 그림들이라도 모아서 형태를 갖추고, 무너진 돌덩이들을 맞추어 옛 모습을 복원해냈다. 심지어는 건물 외관에 그려진 프레스코 화까지도 그대로 그려 넣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한 건축폐기물도 버리지 않고 보관해 언젠가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고 했다.
아마도 독일군에 의해 짓밟힌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기 위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건축물에 대한 파괴행위에 숨어있는 이유 등을 추적한 ‘집단기억의 파괴’에서 로버트 베번은 “재건을 통해 건축물을 구조하는 임무에는 파괴 이후의 관습과 공식적으로 인정된 역사에 부합하는 거짓 기억을 이식할 위험이 존재한다. 재건된 역사는 그것이 위조된 것일 때도 과거의 진본 기록으로 읽힐 수 있다”고 우려한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