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연안국 여행 2일째다. 시차적응에 실패한 탓에 3시 무렵 일어났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대(對)아틀란타 브레이브스전에 선발 등판한 LA다저스의 류현진 선수가 5⅔이닝을 던지면서 홈런 두 방을 맞는 등 4실점하면서 패전투수가 됐단다. 전날 잘 치던 타선도 침묵했다니 야구는 참 모를 경기다.
발트해 연안에 있는 러시아의 월경지 칼리닌그라드까지 가는 것이 주된 일정이라서인지 9시에 숙소를 나설 예정이다. 아침식사의 차림은 수수하지만 맛은 깔끔했다. 지금까지 먹어본 유럽 음식들과는 달리 적당히 짠맛에 단맛까지 절제된 느낌이 좋았다. 숙소가 공항근처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됐는데, 이날 바르샤바에서 북쪽으로 가는 일정임에도 전날 굳이 바르샤바 도심의 남쪽에 있는 숙소로 와서 묵은 이유를 모르겠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숙소 밖으로 나가봤지만, 도심에서 떨어진데다가 큰 도로가에 있어서인지 구경거리도 없고, 산책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아 방으로 돌아와 출발준비를 했다. 여행을 같이 하는 일행들이 여행고수들인 것 같다. 모두들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모인 탓에 9시 5분전에 숙소를 출발했다. 이날 점심은 발트연안에 있는 그다인스크(Gdańsk)로 가는 국도 상에 있는 엘브라크(Elbląg)에서 먹을 예정이다.
발트여행기를 시작하면서 소개한 것처럼 이번 여행을 안내한 김영만 가이드는 참 대단하다. 아는 것도 많고 책임감도 투철하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해외여행객들에게 아직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발트연안 지역을 제대로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을 가졌는지도 모르겠다.
9시에 숙소를 나서서 12시 무렵 점심을 먹기 위해 엘브라크에 도착할 때까지 마이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여행을 마칠 때까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통하여 여행지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전해줬다. 덕분에 발트연안지역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됐다.
가끔 내다보는 창밖 풍경은 우리나라와 사뭇 다르다. 영국항공(British Air)에서 부기장으로 활동하는 마크 밴호네커가 쓴 ‘비행의 발견’에 나오는 ‘공간차’라는 개념이 이해된다. ‘공간차’란 지리적으로 떨어진 지역을 비행기로 이동할 때 나타나는 시차에 상응하는 개념이다.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다른 두 지역의 서로 다른 공간 분위기에 적응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기(雨期)라고 해서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구름이 양념처럼 뿌려진 파란 하늘이 푸른 숲과 조화를 이루고 있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진다.
버스에서 내리면 미세먼지는 물론 초미세먼지까지도 느껴지지 않는 청량한 공기를 마실 수 있어 기분은 더 고양된다.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에 따라 귀국할 무렵이면 이런 풍경도 지겨워질 것이라고 김영만 가이드는 덧붙인다. 하지만 귀국하게 되면 폴란드의 청량한 자연을 아쉬워하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푸른 하늘 맑은 공기를 즐길 수 있는 날을 손으로 꼽게 됐으니 말이다.
도로변에 옥수수 밭이나 텅 비어있는 밭이 널따랗게 펼쳐지곤 한다. 비어있는 밭은 휴경지이거나 추수 끝난 밭이다. 도로가에 보이는 숲에는 자작나무 혹은 소나무가 많다. 스웨덴에서 많이 수입해간다고 했다. 이케아가 수입 물량의 대부분을 사간다. 스웨덴산 나무만으로는 수요를 맞출 수 없다고 한다. 이케아사가 조립가구에 착안한 것은 특히 북유럽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했다.
지리적으로 밤이 긴 북유럽 사람들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집에서 보내는 그 시간을 활용하기 위한 무언가에 집중하는 능력이 커졌다고 한다. 다른 지역에 비해 북유럽 사람들이 손재주도 좋고 집중도 잘하기 때문에 완성품 가구를 사기보다는 이케아의 조립가구를 사서 스스로 조립해 사용하기도 하고, 직접 제작하기도 한다고 했다. 발트연안 사람들은 아직도 많이 순박한 편이란다.
폴란드 국경을 넘기 전에 폴란드 역사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마지막 폴란드 왕이자 리투아니아대공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가 생전에 합의한 바에 따라 폴란드 왕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으로 전환되면서 국왕을 의회에서 선출하게 됐다. 1573년 폴란드 의회가 프랑스의 샤를 9세의 동생 헨리크 발레지(Henryk Walezy를 국왕으로 선출하면서 야기에우어왕조의 폴란드 왕국이 막을 내렸다. 세임, 즉 의회가 선출하는 국왕이 다스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해 17세기 초에는 모스크바를 점령하는 등 기세를 올리기도 했지만, 17세기 중반에는 스웨덴이 침입해와 바르샤바가 함락되기도 했다. 17세기 말에는 신성동맹에 가담해 오스트리아의 비엔나를 침략해온 오스만 투르크를 무찌르기도 했다. 장기간에 걸쳐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있던 폴란드는 국력이 급속하게 쇠퇴했고, 새롭게 부상하기 시작한 러시아와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폴란드를 분할하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200년이 넘도록 프랑스의 발루아 왕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왕조, 야기에우어왕조, 바사왕조, 베틴왕조 등의 출신은 물론, 비시니오비에츠키, 소비에스키, 레슈친스키 등을 국왕으로 선출하다가 1764년 선출된 포니아토프스키를 마지막으로 1795년 연방이 붕괴되면서 문을 닫게 된다.
이후에는 합스부르크왕조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시작한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로마노프 왕조의 폴란드 입헌왕국, 신성로마제국 호헨촐레른 왕조의 포젠대공국 등이 분할해 통치하는 시대가 1918년까지 이어졌다. 폴란드의 민중은 독립을 위한 염원을 이어갔지만, 귀족들은 특권을 보장해준 분할 통치국에 충성을 다했다.
나폴레옹의 등장과 함께 독립을 꿈꿨던 폴란드 민중들은 나폴레옹에 협력을 아까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후에도 독립의 염원을 담은 저항운동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분할통치국가의 탄압으로 좌절되곤 했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공화국으로서 독립을 얻었지만, 이는 1939년 독일 나치당의 제3제국에 병합될 때까지의 짧은 시기에 불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다시 독립정부가 들어섰지만,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의 조종으로 1952년 폴란드 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1980년 그단스크를 중심으로 한 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자유노조연대가 발족하게 되고, 1989년에는 자유선거가 처음 실시됐고, 1990년 민선대통령을 선출하게 됐다.
바르샤바를 떠난 버스가 3시간을 달려 도착한 엘블라크(Elblag)에서 점심을 먹었다. 레스타우라치아 메타모르포사(Restauracja Metamorfoza)라는 지하에 있는 식당인데 독특한 점이 참 많았다. 이름부터가 범상치 않다.
메타모르포사라는 폴란드어는 생물학에서 사용하는 전문용어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변태(變態)라고 옮기는 이 단어는 ‘성체(成體)와는 형태·생리·생태가 전혀 다른 유생(幼生)의 시기를 거치는 동물이 유생에서 성체로 변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아직은 제대로 된 식당으로 바뀌는 과정의 식당이라고 해야 되나?
식당의 내부는 온통 하양 일색이었다. 벽을 하얀색으로 바른 것은 물론 얇은 망사로 만든 커튼도 하얀색, 전등갓까지도 하얀 종이로 만든 조형예술이었다. 메인요리는 얇게 저민 닭 가슴살에 양념을 올렸는데 먹을 만했다. 메인요리 다음에 나온 후식을 제공하는 과정이 일종의 깜짝이벤트였다.
식당에 들어가기 전부터 놀라지 말라는 김영만 가이드의 귀띔이 있었기에 더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식사가 끝날 무렵 불이 꺼지더니 예쁜 여종업원들이 후식으로 내는 아이스크림 하나하나에 작은 촛불을 꽂아 마치 생일케이크처럼 쟁반에 담아 들고 나왔다. 식사 후에는 식당 주변을 돌아보는 자유 시간을 가졌다. 식당에서 나온 일행 대부분은 거리 끝에 보이는 시계탑 방향으로 향했는데, 필자는 식당 뒤로 보이는 커다란 종탑을 찾아갔다.
혼자 찾아간 교회에서는 마침 주말을 맞아 예배를 마친 신도들이 나오고 있었다. 교회 내부는 조촐했다. 교회 문 앞에 붙여놓은 폴란드어 안내판은 읽을 수 없었지만, 지금 찾아보니 성 니콜라스 성당이다. 1247년경 고딕 양식으로 지은 이 가톨릭성당은 1573년 시의회의 결정에 따라 루터교에 소속됐다가 1611년 바르샤바 조약에 따라서 다시 가톨릭교구 소속으로 환원됐고, 1992년에 다시 대성당으로 승격됐다.
종탑의 높이가 97m에 달하는, 비스와강 서쪽의 폴란드에서 가장 높은 종교건물이다. 1777년 4월 26일, 폭풍이 도시를 뒤엎었을 때 번개가 종탑을 내려쳐 불이 붙었고 교회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그로인해 둥근 천정이 무너지면서 제단을 비롯한 교회 내부를 파괴했다. 하지만 재정이 어려워 본래 모습으로 복원할 수 없었다. 3개의 탑은 모두 철거됐고, 교회는 6.5m 이상 낮게 지어졌다. 현재의 종탑은 1906~1907년 사이에 지은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는 종탑에 매단 6개의 청동종이 공출돼 녹여진 이외에 피해가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던 1945년 2월 소련군이 엘브라크를 함락하는 동안의 성촉절(Gromnicznej)에 불타버렸다. 1948년 교회 재건위원회를 꾸려 복원에 나섰다.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과 젊은 공무원들의 자원봉사로 무너진 교회의 잔해를 치웠지만, 교회의 복원은 지지부진하기만 했고, 성직자들에 대한 박해가 이어졌다. 1954년에 들어서야 복원작업이 시작돼 1965년에서야 마무리됐다. 스테인드글라스 창문도 1969/1989년 사이에 설치됐다.
폴란드의 작은 도시의 여유를 즐긴 일행은 1시 10분에 모여 버스를 타고 러시아의 월경지 칼리닌그라드로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1시간 반 정도 달려 도착한 곳은 폴란드의 그제호트키(Grzechotki)와 러시아의 마모노보(Мамоново)를 연결하는 국경이었다. 그제호트키와 마모노보 국경 건널목은 1992년 5월 22일 폴란드 정부와 러시아 정부 간에 체결된 합의로 설치됐다. 국경은 24시간 열려 있고, 승객과 화물 운송이 허용된다.
이곳에서의 출입국 절차를 소개하자면, 폴란드 출입국사무소에서는 근무자가 버스에 올라 여권소지자 본인임을 확인하고서 여권을 걷어가 스탬프를 찍어 오는 것으로 출국심사가 끝났다. 밝은 표정의 근무자는 농담도 하면서 여유를 보였다. 국경에 도착하고 20분도 안돼서 여권을 받았다. 그리고 출발한 버스는 5분도 안 돼 러시아 출입국사무소에 도착했다.
러시아 입국심사과정은 3단계로 진행됐다. 1단계에서는 무표정한 여자근무자가 버스에 올라와 여권을 보면서 본인여부를 확인했다. 2단계에서는 버스의 짐칸은 물론 버스 아래까지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일행 모두 버스에서 내려 출입국장까지 이동해서 입국신고를 했다. 짐 가방까지 들고 가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운이 좋았는지 짐 가방은 버스에 두고 갔다.
여권에 입국 도장을 받고 입국신고필증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 화장실은 청결했다. 버스가 이동해간 다음 초소에서 진행된 3단계에서는 다시 근무자가 버스에 올라 여권에 받은 스탬프와 입국신고필증을 확인한다는데 역시 운 좋게 그냥 통과됐다. 통상 1시간 이상 소요된다는 전체 과정이 30분 만에 종료됐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