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Кафедральный собор)은 칼리닌그라드 도심을 흐르는 프레골랴(Преголи) 강 위의 섬에 있다. 칼리닌그라드주의 체르야코프스크(Черняховск)에서 인스투르차(Инструча) 강과 앙그라피(Анграпы)가 합류하는 지점에서 시작하는 프레골랴 강은 길이 123km로 칼리닌그라드에서 가장 긴 강이다.
버스는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이 있는 메도비 모스트(Медовый мост, 밀교(蜜橋; 꿀 다리라는 뜻)) 앞에서 내린다. 13세기 중반 조성되기 시작한 쾨니히스베르크(지금의 칼리닌그라드)는 프레골랴 강이 비스툴라 석호로 나가는 하류에 형성된 섬들과 둑에 흩어져 만들어진 몇 개의 정착지로 출발했다. 알트슈타트(Альтштадт), 크나이프호프(Кнайпхоф), 롬제(Ломзе) 그리고 포슈타트(Форштадт) 등이 중요한 마을이었다.
15세기 들어 이 마을들을 연결하는 다리가 건설됐다. 중세 무렵에는 이 다리들이 방어 목적으로 강화됐는데, 마을 사이에도 전투가 벌어지기도 했을 뿐 아니라 폴란드나 리투아니아 등 주변국의 침략을 경계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다리 앞에 방어탑을 세우고, 참나무로 만든 잠금식 뜬 다리 혹은 이중으로 된 문을 만들었다. 일부 다리의 지지대는 전형적인 요새에서 보이는 오각형 모양이었다.
쾨니히베르크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다리에 서서 프레골랴 강에 동전을 던져야 하는 전통이 있었다. 1990년에 준설선을 동원해 프레골랴 강의 수로를 청소하는 동안 화폐학자들과 수집가들이 몰려들어 강바닥에서 퍼 올린 오니(汚泥)에서 희귀한 동전을 찾으려 법석을 떨기도 했다. 다리는 전통적으로 종교행렬이나 축제행렬이 지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모두 7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롬제와 크나이프호프를 연결하는 메도비 모스트는 가장 늦게 만들어졌다. 크나이프호프에는 쾨니히대성당, 조각공원 등이 있기 때문에 메도비 모스트는 주로 보행자들이 이용했다.
메도비 모스트라는 이름을 얻게 된 이유로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그 중에는 꿀을 파는 비젠로드(Безенроде)라는 상인이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프레골랴 강에 다리를 놓으려 했다. 그런데 허가를 얻는 과정에서 크나이프호프 시청 공무원들에게 뇌물로 꿀통을 바쳤다는데서 유래했다고 하는 설명이 있다.
알트슈타트 사람들은 싫어하는 크나이프호프 사람들을 ‘꿀이나 핥는 사람(медовыми лизунами)’이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조롱’을 의미하는 혼(хон)에서 유해한다는 설명도 있다. 이 다리를 놓게 되면서 크나이프호프 사람들은 알트슈타트로 가는 비소키 모스트(Высокий мост, 고가교(高架橋)라는 뜻)를 거치지 않아도 롬제로 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버스에서 내린 메도비 모스트 앞 도로 건너편에 말끔한 모습의 건물이 눈길을 끌었다. 2011년 재건을 시작해 2018년에 완공을 본 유대교 회당이다. 2011년 7월 14일 칼리닌그라드의 유명한 사업가 블라디미르 카트만과 칼리닌그라드의 유태인 공동체가 같이 설립한 ‘칼리닌그라드시의 회당 건설을 위한 재단’이 복원을 주도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의 유대인의 역사는 1508년 이삭 마이(Isaac Mai)와 미카엘 아브라함(Michael Abraham)이라는 2명의 의사가 이주해오면서 시작됐다. 쾨니히스베르크의 유대인 공동체는 인근에 있는 폴란드나 리투아니아의 도시에 비하여 규모가 작았다. 하지만 프로이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한 1671년 이후 비엔나에서 탄압받던 유대인들이 쾨니히스베르크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1680년에 최초의 유대회당이 트락하이메(Трагхайме)에 세워졌다. 1756년에 307명의 유대인이 쾨니히스베르크에 살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5000여명에 이르렀다. 나치가 집권하기 전까지 5개의 회당, 3개의 유대인 묘지, 고아원과 요양원을 비롯해 다양한 유대인 단체가 있었다.
1756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허가를 받아 포슈타트 회당(Синагога в Форштадте)을 건설했는데 1811년 화재로 불탔고, 이때 임마누엘 칸트가 태어난 집도 전소됐다. 불탄 회당은 1815년 재건됐다. 이후 1894~1896년 사이 회당 앞 린덴스트라세(Линденштрассе)에 회당을 새롭게 건설하고 새 회당(Новая Синагога)이라 이름 붙였다. 이후 이전 회당은 옛 회당(Старой Синагогой)이라고 했다.
새 회당은 높이가 46m에 이르렀으며,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대교 회당으로 꼽혔다. 하지만 1938년 11월 9~10일에 걸쳐 나치돌격대와 독일인들이 유대인과 유대상점을 공격한 ‘수정의 밤(Kristallnacht)’ 사건에서 불타고 말았다. 새 시나고그(Synagogue)라고 하는 복원된 유대회당의 왼쪽에 있는 갈색 건물은 00그다니에 예브레이스코고 시로츠코고 프리유타 스 베르체르니 쉬콜리(Здание еврейского сиротского приюта с вечерней школой, 유대인 고아원 및 야학이라는 뜻)이다.
한때 도시와 지방을 위한 유대 고아원이라고 불렀던 이 건물은 1905년에 유대회당 인근에 건축가 프리츠 베렌트(Fritz Behrendt)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다. 베렌트는 건물을 거리에서 물러 들이면서 작은 정원을 만들었다. 개원 뒤에는 쾨니히스베르크는 물론 동프로이센 전 지역에서 온 유대인 고아 45명을 수용했다.
1938년 11월 10일 ‘수정의 밤’에 독일 사람은 건물에서 아이들을 몰아낸 다음 내부시설을 파괴했다. 다음해 파괴된 건물을 학교로 사용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상당 부분이 파괴돼 복원해야했다. 지금은 주거용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물 측벽에는 홀로코스트 희생자를 기리는 내용을 러시아어, 히브리어 그리고 독일어로 새긴 명판이 붙어있다.
메도비 모스트를 건너 크나이프호프(지금은 공식적으로 임마누엘 칸트 섬이라고 부른다)로 들어가면 왼쪽에 널따란 풀밭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이 있다. 1297~1302년 사이에 대성당의 전신이 되는 작은 성당을 알트슈타트의 남동쪽에 지었다.
하지만 삼랜드의 주교 요한 클레어(Johann Clare)는 교회가 너무 작기 때문에 새 성당을 지어야 한다고 고집했고, 튜턴기사단의 17번째 최고지도자(Hochmeister) 베르너 폰 오셀른(Werner von Orseln)이 크나이프호프의 동쪽 끝에 새 성당을 짓기로 했다. 새 성당부지는 늪지였기 때문에 수백 개의 참나무 기둥을 넣어야 했다. 알트슈타트에 있던 옛 성당은 철거됐다.
1330년 벽돌을 사용해 두터운 벽과 흉 벽을 비롯한 방어 장치가 있는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한 대성당은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에 성직자와 기사 합창단 그리고 유리벽으로 분리된 3개의 통로가 있는 평평한 나무천정과 탑으로 구성됐다. 5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건설기간이 소요된 1380년, 성당이 완성됐지만, 프레스코화 작업은 14세기 말까지 지속됐다.
완공된 성당은 성모 마리아와 아달베르트(Adalbert) 성인에게 헌정됐다. 1440년경 대성당을 재건하면서 완전히 아치형으로 된 본당을 만들고, 서쪽에 있는 입구에는 남쪽과 북쪽에 각각 첨탑을 세웠다.
1522년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Brandenburg-Ansbach)의 알브레히트(Albrecht)가 루터의 조언에 따라 프로이센 공국으로 국체를 바꿈에 따라 1523년부터 요한 브리스만(Johann Briesmann)은 쾨니히베르크 대성당에서 루터교 교리에 따라 예배를 드렸다.
1544년 화재로 두 탑이 모두 파괴됐다. 남쪽 탑은 뾰족한 십이궁 지붕으로 재건됐고, 북쪽 탑은 남은 유적 위에 간단한 박공지붕을 세웠다. 1640년에는 남쪽 탑에 시계를 설치했다. 1695년에는 오르간을 놨다. 1833년에는 대성당이 복원됐고, 1888년에는 새 오르간을 설치했다.
1901~1906년 사이에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의 유리화가 루돌프와 오토 린네 만(Rudolf und Otto Linnemann)이 11개의 창문을 만들어 성탄, 부활, 이집트로의 여행, 예수의 세례, 산상 수훈, 등에 관한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수행했다.
1944년 8월 29일과 30일 밤 영국 왕립공군의 공습으로 대성당 섬을 비롯해 다른 도심 및 인근 지역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됐다. 전후 쾨니히스베르크가 소비에트 연방에 병합돼 칼리닌그라드가 됐지만,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에서야 복원이 논의돼 1993년 시작된 복원작업은 1998년에 마무리됐다. 오늘날 대성당은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아니라 문화 종교센터로 활용되고 있다. 개신교와 정교회 예배당, 세례당, 성당 박물관, 칸트 박물관, 도시 박물관 및 왈렌롯트(Wallenrodt) 도서관 등이 들어있다.
성당 아래에 있는 왕자들의 동굴에는 앨버트 공작과 그의 친족들, 튜턴기사단의 최고지도자, 주교 및 귀족들의 무덤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대성당에는 제단이 여럿 있었는데, 제단화 가운데 ‘단치히의 화가’라 불리던 안톤 묄러(Anton Möller)가 그린 ‘사람의 가을(Sündenfall)’, ‘성 요한의 세례(Taufe des Hl. Johannes)’, ‘최후의 만찬(Abendmahl)’, ‘십자가의 고난(Crucifixion)’ 등 4점의 제단화가 볼만했다고 한다. 대성당은 길이 88.5m였고, 높이는 32.14m다. 대성당에서 가장 높은 남쪽 첨탑의 높이는 50.75m에 달했다.
대성당의 북동쪽 귀퉁이에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현자’인 임마누엘 칸트의 무덤이 있다.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난 임마누엘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00km를 벗어나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원래 칸트의 유해는 성당 안에 안장돼 있었지만, 1880년 지금의 위치와 가까운 곳에 지은 신고딕 양식의 예배당으로 옮겨 안치됐었다. 다만 예배당이 황폐해져 철거가 불가피해지면서 건축가 프리드리히 라르(Friedrich Lahrs)가 설계한 묘역을 지금의 위치에 새로 조성해 1924년 완공된 후 다시 옮겨졌다.
칸트는 서양철학에 있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룬 학자로 꼽힌다. 오죽하면 “칸트 이전의 모든 철학은 칸트라는 큰 호수로 들어오고, 칸트 이후의 모든 철학은 칸트에서 시작한 물줄기다”라는 비유가 나왔겠는가. 그가 발표한 ‘순수이성비판(1781)’, ‘실천이성비판(1788)’, ‘판단력비판(1790)’을 통해 인식론, 윤리학, 미학, 자연관 등 다양한 철학의 영역에서 혁명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런 평가가 나왔을 것이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의 김상환 교수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식에 있어서 주체와 대상의 관계를 전도시켰다고 설명한다. 칸트 이전까지 인식의 출발점에 대상이 있고 주체는 그 대상을 수동적으로 비추는 거울로 간주됐던 것을, 인식의 중심에 대상이 아닌 주체가 있다고 봤던 것이다.
‘실천이성비판’에서는 ‘덕’윤리를 ‘의무’윤리로 전도시켰다. 칸트는 선(善) 개념이 중심에 있고 도덕법칙이 주위를 감싸는 구조였던 덕윤리와는 달리, 의무윤리의 중심에는 도덕법칙이 자리하고 선개념이 주위를 감싸는 구조로 봤다.
‘판단력비판’에서는 아름다움을 감식하고 향유하는 취미판단의 보편적이고 필연적 타당성을 입증해 근대예술을 정초(定礎)하고, 유기체가 요구하는 목적론적 판단을 분석해 유기체적 자연관의 가능성을 정초(定礎)함으로써 낭만주의적 자연관이 도래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