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먹기 전에 카우나스 성(Kauno pilis)을 돌아봤다. 네무나스 강이 네리스 강에 합쳐지는 두물머리에 있는 성이다. 네리스(Neris) 강은 벨로루시의 수도 민스크 북쪽에 있는 비아홀리(Бягомль) 부근의 늪에서 발원한다. 전체 길이 511㎞ 가운데 276㎞는 벨로루시의 영토를 지나는데, 벨로루시에서는 빌니아(Ві́лія) 강이라고 부른다.
리투아니아 영토를 흐르는 235㎞길이의 구간은 네리스 강이라고 부른다. ‘Neris’라는 이름은 인도-유럽어에 뿌리를 둔 발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흐름’, ‘빠르고 소용돌이치는 흐름’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슬라브어에서 온 빌니아의 경우는 ‘큰’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총길이가 937km에 달하는 네무나스 강은 벨로루스의 민스크에서 남쪽으로 45km 떨어진 베르크-네만(Верх-Нёман)에서 시작해 서쪽으로 462km를 흐르다 리투아니아와 국경을 이루는 17.3km 구간을 지난다. 이후 359km의 리투아니아 영토를 관통해 하류 98.7km 구간은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주와 국경을 이루며 쿠로니아 석호(Куршский залив)로 흘러든다.
‘Nemunas’라는 이름이 어디서 유래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발트해 지역은 물과 관련된 이름으로 많이 발견된다. 카지미에라스 부가(Kazimieras Būga) 교수는 ‘젖은 땅’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 케이스투티스 데메렉(Kestutis Demereck)은 ‘소리 없이 유장한 강’이라고 했다.
네무나스 강의 이런 모습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네무나스를 ‘강의 아버지’라고 한다. 남성명사로 표시하는 네무나스는 남자 강, 네리스는 여자 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난 회에서 소개한 리투아니아 시인 마이로니스의 시 ‘세수페가 달리는 곳(Kur bėga Šešupė)’의 첫머리에서도 나온다. “세수페가 달리는 곳, 네무나스가 흐르는 곳, 이곳은 우리의 고향, 아름다운 리투아니아입니다.”
그런가하면 아우구스트 하인리히 호프만 폰 팔러스레벤(August Heinrich Hoffmann von Fallersleben)이 쓴 시, ‘독일인의 노래(Das Lied der Deutschen)’에서도 네무나스강이 나온다. “마스에서 메멜까지 / 에취에서 벨트까지 / 모든 것에 대해 독일, 독일, / 세계의 모든 것에 대해!(Von der Maas bis an die Memel, / Von der Etsch bis an den Belt – / Deutschland, Deutschland über alles, / Über alles in der Welt!)”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독일국가로 채택된 시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생각하는 네무나스 강과 독일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멜 강의 의미는 사뭇 다른 듯하다. 참고로 독일어로는 네무나스 강을 메멜 강이라고 한다.
네무나스 강과 네리스 강이 합류하는 곳에 석조성이 언제 세워졌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4~5세기에 이미 나무와 점토로 둘러싸인 정착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361년 튜튼기사단의 최고지도자 윈리히 폰 크니프로데(Winrich von Kniprode)가 성을 공격하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세기 초에 석조성이 존재했을 것이다.
1362년 튜튼기사단은 성을 포위했고, 3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함락시켰다. 하지만 리투아니아 대공 케스투티스 게디미나스(Kęstutis Gediminas)는 곧바로 카우나스성을 수복해 재건했다. 튜튼기사단이 파괴한 성을 대체하는 2번째 성은 먼저 있던 성의 기단 위에 두께 3.5m, 높이 9.5~12m로 벽돌을 쌓은 성곽으로 이뤄졌다.
성곽의 4구석에는 탑을 세웠는데, 2개는 원형으로, 두 개는 사각형으로 만들었다. 성벽 밖에는 해자를 설치했고, 내부에는 벽을 따라 작은 총포를 쏠 수 있는 나무 회랑을 설치했다.
1410년 그륀발트 전쟁 이후에는 성의 전략적 중요성이 떨어지면서 감옥과 같은 행정적 목적으로만 사용하게 됐다. 17세기 초반에 네리스 강이 범람해 북쪽 탑이 무너졌다. 방치됐던 카우나스 성은 1930년부터 보존을 위한 발굴이 시작됐다. 본격적인 복원은 1950년대에 이뤄졌는데, 원형 탑도 약간의 수리를 받았다. 오늘날 원형 탑에는 미술관이 있다.
카우나스 성의 광장에는 높이가 7m에 달하는 청동기마상이 서있다. 2018년 7월 14일에 제막한 ‘자유의 전사’상이다. 리투아니아 조각가 아루나스 사칼라우스카스(Arūnas Sakalauskas)가 우크라이나 조각가 보리스 크리로프(Boris Krylov)와 올레스 시도루크(Olesius Sidoruk) 등과 공동으로 제작한 것으로 우크라이나의 키에프에서 주조됐다.
사칼라우스카스는 빌니우스의 루키스키(Lukiškių) 광장에 세우기를 희망했지만, 빌니우스 시가 거절했기 때문에 이 곳 카우나스 성의 광장에 세워야했다.
카우나스 성의 광장을 떠나 네리스 강과 네무나스 강이 합류하는 두물머리에는 널따란 공원이 펼쳐진다. 리투아니아 10대 공원에 들어가는 산타카 공원(Neries Ir Nemuno Santaka)이다. 길가에는 운동기구도 놓여있고, 조각 작품도 전시돼있다. 두물머리까지 구경하다보니 약속시간에 조금 늦었다.
조금 늦어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점심을 급하게 먹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야채를 곁들여 양념한 돼지고기와 함께 감자튀김이 나왔는데 개인적으로는 만족할만했다. 버스에서 내린 장소로 이동하면서 보니 3층 높이의 건물 벽에 그린 그림이 독특하다.
찾아보니 플럭서스(Fluxus)라는 포괄적인 예술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리투아니아 예술가 타다스 심쿠스(Tadas Šimkus)와 지기만타스 아멜리나스(Zygimantas Amelynas)가 그린 ‘현명한 노인(The Wise Old Man)’ 혹은 ‘장인(Master)’이라는 작품이다. 과거에 신발공장이었던 3층 건물의 440㎡나 되는 외벽에 잠옷을 입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노인을 그렸다.
그런데 신발공장이던 건물의 외벽에서 맨발의 노인을 봐야 하는 것은 당황스럽지 않을까 싶다. 두 화가는 플럭서스 운동(Fluxus ministerija)의 선구자인 카우나스 출신 예술가 저기스 마치우나스(Jurgis Mačiūnas)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그렸다고 한다.
플럭서스 운동은 1960~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된 예술의 상업화와 엘리트 예술가들이 예술계를 지배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이다. 저기스 마치우나스가 존 레논의 부인 오노 요코(Yoko Ono), 영화감독 조나스 메카스(Jonas Mekas) 등과 함께 주도했다. 마치우나스와 메카스는 리투아니아 출신이라고 한다. 플럭서스 운동가는 버려진 건물을 공개 스튜디오를 비롯해 공연 및 전시공간으로 활용했는데, 쇠락해가던 뉴욕의 소호지역을 되살리는 성과를 올렸다.
점심을 먹고 1시에는 다음 일정인 시아울리아이(Šiauliai)로 출발했다. 시아울리아이는 인구 10만7086 명으로 리투아니아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도시를 구경하는 일정은 없고, 시아울리아이에서 12㎞ 북쪽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Kryžių kalnas)을 보러 가는 것이다. 카우나스에서 십자가의 언덕까지는 2시간 20분이 걸렸다.
카우나스에서는 맑던 하늘에 구름이 늘어가더니 결국 2시반쯤 빗방울 한 둘 쏟아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쏟아지는 비로 운전하는 기사는 불편하겠지만, 버스에서 내릴 때만 멎어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여행 중에 날씨를 확인하던 IBM 일기예보가 비교적 정확하게 맞는 편이었다.
이곳에 십자가를 처음 세운 것은 1830~31년 폴란드-러시아 전쟁으로 알려진 11월 봉기 이후라고 한다. 지금의 십자가 언덕 북쪽에 있는 주르기치아이-도만타이(Jurgaičiai-Domantai) 언덕 요새에 십자가를 처음 세웠다고 한다. 봉기에서 실종된 사람들의 가족들이 이 언덕에 십자가를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1918년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얻었을 때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독립 운동 기간 중에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자 이곳을 찾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십자가뿐 아니라 성모 마리아 동상, 리투아니아 애국자의 조각, 수천 개의 작은 인형과 묵주 등을 가져왔다.
소비에트가 지배하는 동안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를 없애려는 노력을 적어도 3차례(1963년, 1973년 포함) 시도했다. 불도저로 언덕을 밀어내 나무 십자가는 불태우고 금속 십자가는 망가뜨렸지만, 마을 사람들은 곧바로 언덕에 십자가를 다시 세웠다.
1990년에는 약 5만5000개의 십자가가 있었고, 2006년에는 10만개 이상의 십자가가 언덕을 채우고 있다. 십자가의 언덕이 이렇게 붐비게 된 것은 1993년 9월 7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십자가의 언덕을 방문해 희망과 평화, 사랑, 희생의 장소라고 선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3시20분경 십자가의 동산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초원에 난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가면 저만치 야트막한 동산이 보인다. 그리고 빼곡하게 들어선 십자가들. 십자가의 언덕 초입에는 커다란 예수상이 서있다. 예전에 마리아상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마리아상을 가져다 둔 이가 이슬람으로 개종하면서 스스로 치웠기 때문이란다.
2개의 야트막한 동산에는 크고 작은 십자가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데 십자가들이 쓰러져 그냥 쌓여있는 곳도 있다. 마치 십자가의 무덤처럼. 정면의 입구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비교적 넓은 길이 있고, 중간에는 좁은 길이 이리저리 나 있다. 큰 길 뒤에도 십자가를 세우려다 보니 생긴 길인가보다.
십자가에는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적은 글을 볼 수 있다. 내용을 보면 복을 기원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성지였던 이곳이 세계인들의 성지로 변모하는 중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물론 기독교도가 많지 않은 일본사람들 것도 있다. 미리 준비해서 오기도 하지만 주차장 옆 가게에서 산 뒤에 발복문을 적어 세우기도 한다.
기독교가 기복신앙인 줄은 몰랐다. 종교가 없다보니 십자가의 언덕 위에 세워진 멀쩡한 혹은 부서져가는 십자가를 보는 것이 특별한 구경거리가 되는지는 모르겠다. 기독교나 가톨릭을 믿는 분들이라면 남다른 바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려 40분이나 되는 자유시간 동안 별로 할 일이 없어 길가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었다. 봄에는 유채꽃이 만발한다는 널따란 벌판 위로 뭉게구름이 피어오르고 멀리 먹구름이 비를 쏟는 모양이다. 4시에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향해서 출발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