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 기자의 트루라이프] 보령의 80세 청년 석공예가 “벼루 명장 김진한”

[곽 기자의 트루라이프] 보령의 80세 청년 석공예가 “벼루 명장 김진한”

기사승인 2020-01-07 04:00:00


-가업 3대 이어온 80년 벼루인생-

-새로운 작품 도전은 늘 가슴 설레는 일-

-한두 시간 작업 해도 어깨 저리고 가슴에는 검붉은 멍자국 선연-

-전직 대통령 퇴임 전 생일 선물은 늘 내 작품으로-

-문방사우 즉 지필묵연(文房四友=紙筆墨硯) 종이벼루-

내가 낼 모래면 팔십인데 아직도 마음에 드는 작품을 못 만들었어, 지금도 돌 앞에 앉아 조각도를 잡으면 마음이 설레

세밑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가 이어졌던 지난 달 24, 평생 좋은 돌을 골라서 자르고 조각 작업을 이어온 석공예가 김진한(80) 남포벼루명인을 충청남도 보령 시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에서 만났다. 팔십 노인답지 않게 초롱초롱한 눈매와 꼿꼿한 몸의 장인(匠人)은 두툼한 손으로 자신의 작품을 들어 보이며 여유롭게 말했다.

무형문화재 6호 서암 김진한(書岩 金鎭漢) 명인은 할아버지 김형수, 인간문화재로 인정받던 남포벼루 대가(大家) 아버지 김갑용에 이어 3대째 가업을 이어오고 있는 전통 남포연(남포벼루)의 상징이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다듬잇돌이나 맷돌을 만들어 5일장에 내다 팔다가 뒤늦게 힘이 덜 들고 수입도 괜찮은 벼루를 만들기 시작했다. 김진한 명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한평생 벼루를 만들었으며 일제 강점기 보통학교에서 벼루 제작 기법을 가르치는 벼루교사로 일을 했다.

손재주 좋은 부친은 일제 강점기 시절, 마치 꽃게가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동감 있는 꽃게 모양 벼루를 제작해 일본에서 산업훈장도 받고 이 벼루를 일본 왕에게 선물로도 전했다고 한다.

현재까지 살고 있는 보령 시 청라면 의평리에서 오 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난 김진한 장인(匠人)은 어려서부터 선친 김갑용의 공방과 마당의 크고 작은 벼룻돌을 친구 삼아 성장했다.

유독 돌 만지기를 좋아했던 김 장인은 아버지 어깨너머로 배운 솜씨로 초등학교 시절부터 벼루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니 어느새 돌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칠십 년이 넘어.

한 가지 일에 70년 넘게 매달렸으니 장인(匠人)의 경지를 넘어 선인(仙人)에 가깝다.

김 씨는 어릴 적 아버지가 벼루 만드는 일이 신기해 아버지가 학교에 수업 나가신 사이 작업 중이던 벼루에 손을 대 망가뜨리고 혼도 많이 났다. 하지만 손재주 좋은 김 씨는 얼마 안 가서 아버지로부터 인정 받았다.”고 회상했다대천고등학교 재학시절 가업 3대째 전수자의 삶을 스스로 택하면서 그의 벼루 인생이 시작되었다.

그는 선친을 도와 집에서 50리 길인 백운사가 위치한 성주산(680m)을 수없이 오르고 내리며 좋은 벼룻돌을 찾아 헤맸다.

그 시절 형편이 어려워 주지스님께 쌀 조금씩 갖다 드리고 절 주변에서 원하는 돌을 주어다가 벼루를 만들었지. 지금처럼 현대식 장비가 없었던 시절 공구마저 빈약해 질 좋은 원석을 찾아내도 운반하기가 힘들었어. 욕심껏 많이 짊어졌다가 중간에 내려놓기도 여러 차례였어.” 김 씨는 그러한 경험을 통해 어떤 돌이 벼룻돌로 가장 뛰어난 것인가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뛰어난 안목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한다.

벼루 전시관에서 인터뷰 도중 기자가 어떤 돌이 좋은 돌이냐?’ 질문에 말없이 망치를 들더니 따라 나오란다.

밖으로 나서니 웬만한 석재공장 못지않게 둔덕만큼 쌓인 크고 작은 돌들과 그 뒤로 김 명인이 직접 개발한 돌을 자르고 다듬는 대형 절단기기와 공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김 명인은 돌들 사이를 오가며 망치로 두드리면서 소리를 비교해 보인다.

어떤 돌은 툭 툭혹은 탁 탁하는 둔탁한 소리가, 또 다른 돌을 두드리니 망치가 돌에서 튀면서 탱 탱맑고 청아한 소리가 들렸다. 좋은 원석은 쇳소리가 나고 무게도 일반 잡석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무겁다고 한다.

그는 좋은 벼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당연히 단단하고 좋은 돌을 고르는 일이 우선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살아있는 좋은 돌들은 무겁고 단단해 조각을 하기도 만만치 않다.

그가 만든 벼루가 품질을 인정받게 된 것도 예술성도 뛰어나지만 남포석 가운데서도 가장 우수한 질의 백운상석(白雲上石)만 골라 쓰기 때문이다. 백운상석은 원석 자체에 흰 구름무늬가 있으며 두드렸을 때 맑고 고운 쇳소리가 나는 조직이 치밀하고 윤기를 띈 최상급 돌이다. 중석(中石)이나 하석(下石)은 일반 벼루를 만드는데 사용한다.

이처럼 백운상석을 기계로 재단해 망치와 징으로 쪼고 자 자를 사용하여 각을 내고 문양을 새기는 등 수 많은 고난의 공정을 거쳐야 간신히 하나의 완성된 벼루가 탄생한다. 특히 단단하고 평평한 표면에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듯 입체감 있는 문양을 세밀하게 새긴다는 것은 자신과의 싸움이고 피땀의 결실이기도 하다.

김진한 명인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큰 스승으로 모시고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고된 수련 과정을 거치면서 전통 남포 벼루를 한 단계 높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 올렸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 씨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벼루 제작기술을 체계화한 점을 인정받아 198712월 충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데 이어 19969월 노동부 석공예 분야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그의 제자인 남포벼루 이영식 이수자는 “45년을 곁에서 작업을 도와드리고 배워왔지만 선생님은 늘 변함없이 한결같다.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존경스럽다.”고 밝혔다.

남포벼루를 만드는 남포상석은 단단해 다루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공들여 제작해 놓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윤이 나고 벼루에 물이 잘 스며들지 않으며 은빛 모래가 적당히 섞여 먹이 잘 갈린다. 조선시대 실학자 성해옹은 남포 벼루는 그 덕이 구슬 같고 한 번 숨을 내쉬면 이슬이 맺힌다.”고 우수성을 말했다. 이같이 예로부터 문예의 대가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온 남포 벼루는 보물 5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 중 두 개가 남포벼루임을 보아도 그 뛰어남을 알 수 있다.

조선조 이후 벼루 공급의 70% 정도를 차지해 온 남포석은 서당의 벼루에서부터 조선조의 문화를 이끌어 온 선비들의 문방 필수품의 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돌은 거짓말을 안 해, 정성과 끈기와 집중력을 가지고 도전하는 수밖에 없어

돌은 한번 잘못 깎으면 되돌릴 수가 없다. 명인은 단단한 돌을 파기 위해서 자신이 고안한 긴 조각칼을 어깨에 대고 밀면서 강약을 조절해가며 아기 다루듯 달래가며 섬세하게 작업을 이어 간다칼로 파낸 조각들을 입으로 호호 조심스럽게 불어내면서 한두 시간 만 작업을 해도 어깨가 저려오고 가슴에는 검붉은 멍자국이 선연하다

지난 세월의 훈장처럼 장인의 손 여기저기도 날카로운 칼과 돌에 찍히고 베여 상처투성이다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작업장 위로 몇 날의 해가 뜨고 별이 지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다.

그래도 명인은 자신의 작업에 대한 자부심과 늘 새로운 형태의 작품이 탄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작품도 의뢰인에게 보내 후 작품 값을 후불로 받은 적도 많다. 작품이 맘에 안들면 언제든 돌려보내란 뜻이다. 하지만 여짓 것 자신의 작품이 돌아온 적도 돈을 못 받은 적도 없단다.

그는 일본 견학 시절, 자연을 최소한으로 훼손하면서 돌을 캐고 정말 세심하고 정성껏 작품을 제작하고 마무리 작업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한다. “우리가 만원받을 제품이면 일본 작가들은 만엔을 받는데 그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이후로 작품의 마무리 작업에 특히 신경을 많이 쓴다고도 밝혔다.

 명장은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서 예전 공부를 많이 해 교장, 교육감, 지자체장 등을 역임했던 친구들에게 너희들은 이제 사회에서 다 써먹고 버린 사람들이지만 나는 아직도 나라가 필요로 하는 최고급 인력이라고 농담하며 크게 웃었다.”고 말했다.

80세 열혈 청년은 예전에 대통령에게 선물한 작품도 다시 보니 마음에 안 든다.’면서 그러니 자꾸 도전하는 마음과 의욕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새로 구상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제자들도 버거워하는 4~50kg의 돌을 번쩍 들어 절단기 위에 올려놓고 자르고 다듬는다.


나는 누가 뭐래도 행복한 사람이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인정받고 돈도 벌어서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도 다 보냈어.” 단 아쉬운 점은 문화재 관련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아들이 나와 달리 체질이 조금 약해서 가업을 잇지 못한다는 거야. 그래도 열심히 전통을 이으려고 노력하는 제자들이 여럿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김 명인은 어려서 송아지를 들기 시작하면 나중에 중소도 들 수 있다한가지 일에 성실히 매달리다 보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찾아온다.”면서 아직도 내 생애 흡족한 벼루는 못 만들었어. 나이 들수록 작품에 대한 안목은 자꾸 높아져. 작품을 위해 술 담배 멀리 한지도 오래됐지~ 건강관리 잘하면서 일생일대 최고의 벼루를 만들기 위해 계속 도전할 거야.”라는 노 작가의 힘찬 다짐이 큰 울림 되어 돌아왔다.

보령=사진 곽경근 대기자 kkkwak7@kukinews.com / 드론=왕고섶 사진가


곽경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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