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스물여덟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2-15 02:00:00

서두른 덕분에 8시 10분, 해가 지기 전에 래디슨 블루 라트비아 콘퍼런스 앤 스파 호텔의 26층 라운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시를 굽어볼 수 있어서인지 일행이 모두 같이 앉을 수는 없었다. 각자 빈자리를 찾아 앉았는데, 아내와 나는 다우가바 강을 굽어볼 수 있는 동쪽 창가 자리를 겨우 차지할 수 있었다. 

해가 지는 쪽은 벌써 사람들이 차지하고 앉아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넘이를 보려면 반대편 좌석으로 가야하는데 앉아있는 손님들이 불편한 듯해서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우연히 화장실에서 해넘이를 볼 수 있었다. 그것도 창문 왼쪽 끝에 겨우 걸리는 바람에 좋은 사진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러시아 동방정교회의 돔에 반사되는 석양이 묘한 대조를 이뤄 다행이었다. 

해넘이를 보고 숙소로 돌아갔으면 했는데, 따로 모여 앉은 일행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느라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9시가 넘어서야 숙소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리가 중앙시장에서 산 블루베리 맛을 보고 11시에나 잠들었다. 리가에서의 하루를 결산해보면 오락가락하는 비 때문에 조금은 불편했지만, 2주 전 예보에 전체 일정이 비라고 해서 걱정했던 것보다는 양호한 편이었다.

발트여행 6일차가 밝았다. 이날은 6시 반에 일어나 7시부터 식사를 하고 9시에 숙소를 나서는 여유 넘치는 일정이었다. 시차를 거의 극복했는지 5시 반 쯤 눈을 떴다. 1시간 정도 걸려 어제 보고 들은 것들을 정리했다. 푸짐하게 아침을 먹고는 출발시간까지 여유가 있어 책을 읽으며 보냈다. 

며칠 째 붙들고 있는지 모르겠다.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에도 가이드가 해주는 발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느라 책 읽을 짬을 낼 수 없었다. 저녁시간에도 늦게 들어와 씻고 나면 피로가 몰려와 금세 잠이 쏟아지는 형편이다. 

약속시간에 맞춰 로비로 내려갔는데,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화창한 아침이다. 9시 정각에 시굴다를 향해 출발했다. 김영만 가이드가 리가에 살고 있는 덕분에 리가에서 많은 것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발트연안국가에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각각 20여명에 불과해서 한인단체를 만들 수도 없다고 한다. 

그래도 리가에 한인식당이 여럿 있다고 한다. 아마도 이곳을 찾는 한국 사람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가이드에 따르면 2017년엔 5000명, 2018년에는 7500명의 한국 사람들이 발트연안 국가를 방문했다고 하고, 2019년에는 만 명 가까이 될 것이라고 했다.

리가에는 카지노가 많아 북구의 라스베이거스라고도 부른다고 했다. 발트연안국 가운데 물가는 비싼 편이라고 한다. 맥주를 예로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 3500원하는 맥주가 라트비아에서는 2유로 정도로, 우리나라보다는 싸지만 리투아니아의 1.5유로이며, 러시아는 그보다도 더 싸다고 했다.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창밖으로 자작나무 숲이 지나간다. 우리나라에서도 자작나무가 있어 팔만대장경의 재료로 썼다고 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고, 국보 제32호인 대장경의 공식명칭은 ‘해인사 대장경판’이다. 8만1352판이나 되는 규모 때문에 보통 ‘팔만대장경’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대장경은 고려 고종 23∼38년(1236∼1251)에 걸쳐 간행됐기 때문에 고려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초조대장경을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 이규보는 “전에도 거란이 쳐들어 왔을 때 초조대장경을 새기니 거란이 알아서 물러갔는데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적었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원나라의 침공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자, 이를 대체할 방편으로 조성하게 된 것이다.

일부 논문에서 팔만대장경을 백화(白樺)나무(자작나무)로 제작한 것이라고 하지만, 전자현미경까지 이용해 경판의 재질을 분석한 결과 산벚나무와 돌배나무가 대부분이고 자작나무는 9% 정도라고 밝혀졌다. 물론 8만여 대장경판 가운데 240여장을 조사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국보로 지정된 팔만대장경 전체를 조사할 수 없는 한계는 있다. 그밖에도 단풍나무나 후박나무 등이 사용됐다.

이들 나무를 사용한 것은 재질이 균일하고, 나무를 이루는 세포 하나하나의 크기가 초밀해 글자의 획을 깨끗하게 파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목재가 너무 단단하면 글자를 새기기가 너무 어렵고, 너무 연하면 쉽게 마모되고, 글자 획 중 가는 부분이 쉽게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산천에서 흔히 자라는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 등 침엽수나 밤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등 활엽수는 재질이 균일하지 않아 경판 제작에 적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 경판 제작에 사용된 나무들은 소나무 등 침엽수나 참나무 등 활엽수처럼 군락을 이루지 않고 잡목 사이에 섞여 자라는 경향이 있어 대장경판을 새길 재료를 모으는데도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다.

리가를 출발한지 1시간10분쯤 경과해 시굴다(Sigulda)에 도착했다. 시굴다는 라트비아에서 해발고도가 가장 높은 곳이라고 했다. 리가에서 동쪽으로 53㎞ 떨어진 시굴다는 가우야 강변에 조성된 인구 1만6679명인 마을이다. 길이 452km의 가우야(Gauja) 강은 라트비아의 동남쪽 비제메(Vidzeme) 고원지대에서 기원해 동쪽으로 흐르면서 에스토니아와의 국경을 이룬다.

계속해서 국경마을인 발가에 가까워지면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발미에라, 체시스, 시굴다 지역을 통과해 리가 만으로 흐른다. 특히 발미에라, 체시스, 시굴다를 아우르는 9만1745ha 넓이의 가우야 국립공원(Gaujas nacionālais parks)은 라트비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국립공원이다.

시굴다 지역은 가우야 강 양쪽 기슭으로 가파른 절벽과 동굴들이 산재한 붉은 데본기의 사암이 분포하고 있어 ‘비제메의 스위스’라고 부른다. 연중 번지 점프를 할 수 있고, 겨울철에는 스키, 봅슬레이, 루지 등 겨울 스포츠를 즐길 수 있다. 시굴다에서 볼거리는 중세의 시굴다 성(Siguldas Viduslaiku pils)과 투라이다성(Turaidas pils) 그리고 그 중간쯤에 있는 구트마니스 동굴(Gūtmaņ ala) 등이 있다.

버스가 계곡으로 들어서는 품이 가우야 국립공원으로 가는 모양이다. 버스에서 내려 구트마니스 동굴을 구경했다. 구트마니스 동굴은 발트연안에서 가장 큰 동굴이다. 폭이 12m에 높이는 10m이며, 깊이는 18.8m이다. 동굴은 10만년 전 빙하기가 끝날 무렵에 빙하가 녹아 흐르는 물이 황갈색의 사암을 침식해 만들어졌다. 

동굴 벽에는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이곳을 찾은 사람이 새겨놓은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17세기에 새겨진 것도 있다. 오늘날에는 동굴의 고고학적 및 지질학적 가치를 고려해 동굴벽에 무언가를 새길 수 없도록 금하고 있다. 지금은 동굴 안에서 샘물이 솟아 가우야 강으로 흘러내린다. 구트마니스 동굴이라는 이름은 독일어로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구트 만(gut Mann)에서 유래한 것이다. 

1779년 야콥 벤야민 피셔(Jacob Benjamin Fisher)는 ‘옛날 선한 사람이 동굴에 살면서 샘물로 사람들을 치료했다’는 전설을 기록했다. 그런가 하면 리보니아의 족장 린다우가스(Rindaugas)가 부정한 아내를 가우야 강 부근에 묻었는데 그 아내가 흘린 눈물이 동굴로 흘러드는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또한 구트마니스 동굴을 고대 발트의 전통종교에서 예식을 올리던 곳이기도 하다. 19세기까지 사람들은 이곳에서 신들에게 제물을 올리곤 했다고 한다.

구트마니스 동굴은 26회에서 소개한 라트비아의 시인이자 극작가 라이니스가 1927년에 발표한 희곡 ‘사랑이 죽음보다 강하다(Mīla stiprāka par nāvi)’의 줄거리가 되는 투라이다의 장미(Turaidas Roze) 전설과 연관이 있다. 폴란드와 스웨덴이 전쟁을 벌이던 1601년 봄 스웨덴 군대가 투라이다(Turaida) 성을 점령했다. 전투가 끝난 뒤에 성의 서기 그라이프(Grief)는 시체 속에서 어린 소녀를 발견하고 집으로 데려와 키우게 됐다. 

마야(Maija)라는 이름을 얻은 그녀는 아름다운 처녀로 자랐다. 사람들은 그녀를 투라이다의 장미라고 불렀다. 그녀는 가우야(Gaujas) 강 건너편에 있는 시굴다 성의 정원사 빅토르스 헤일스(Viktors Heils)를 사랑하게 됐다. 두 사람은 저녁마다 구트만 동굴(Gūtmaņa alas)에서 밀회를 즐겼다.

당시 성에는 아담 야쿠보프스키(Adam Yakubovsky)와 페테르스 스쿠드라이티스(Peters Skudritis)라는 2명의 폴란드 군인이 있었다. 야쿠보프스키는 마야에게 연정을 품고 청혼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야쿠보프스키는 마야를 범하기로 결심하고 빅토르스가 만나자는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마야에게 보냈다. 기쁨에 들뜬 마야가 약속장소에 달려갔을 때 빅토르스가 아닌 야쿠보프스키를 만나게 됐다. 

죽음으로 정절을 지키기로 하고 빅토르스가 준 스카프가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어 칼을 막을 수 있다고 야쿠보프스키에게 찔러보라고 했다. 마야는 결국 죽음을 맞았고, 빅토르스는 마야를 죽였다고 오해를 받아 사형선고를 받게 됐다. 하지만 야쿠보프스키의 편지를 전해준 스쿠드라이티스의 증언에 따라 빅터는 방면됐고 살인을 저지른 야쿠보프스키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야는 투라이다 성의 교회 묘지에 묻혔다. 

이때부터 시굴다에서는 막 결혼한 부부가 영원한 사랑과 헌신을 맹세하기 위해 트루이다의 장미의 무덤에 꽃을 바치는 풍습이 내려오게 됐다. 투라이다의 장미의 슬픈 이야기는 전설로 전해왔지만 19세기 중반 시굴다에 있는 비제메(Vidzeme)의 법원기록 보관소에서 1620년 8월 구트마니아스 동굴에서 일어난 마야의 살인사건에 관한 공판기록이 발견됨에 따라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동굴에 들어가 보면 깊이가 20m 가까이 된다고는 하지만 입구가 널찍하게 열려있는 탓에 몸을 감출만한 장소는 없었다. 게다가 동굴 안팎의 벽에 새겨진 수많은 낙서들은 모두 사랑한다는 연인들의 기록들이고, 무려 17세기의 것도 있다는 것을 보면 이곳을 찾는 선남선녀들이 적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공간에서 마야와 빅토르스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 놀음을 즐길 수 있을까 싶다. 밤에 만났다니 어둠이 도와줬을 수도 있고, 남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긴장감이 사랑 놀음의 마약이 됐을까. 더구나 동굴의 절벽 아래를 따라 흐르는 물을 마시면 젊어진다고 해서 특히 여자들이 사랑하는 이에게 먹인다고 했다. 물론 그 효과가 입증된 것은 아니리라.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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