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임중권 기자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이 배터리(2차전지) 핵심 인력과 기술 유출 침해 여부를 두고 소송전을 벌이는 가운데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가 SK이노에게 지난달 내린 ‘조기 패소판결(DefaultJudgment)’ 승인 판결문을 공개했다.
ITC는 이번 판결문을 통해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와 포렌식 명령 위반에 따른 법정모독 행위를 고려할 때 LG 화학의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패소 판결 신청은 정당하다”고 공표했다.
◆ ITC “LG화학의 조기패소 판결 신청은 정당해”
ITC는 21일(현지시각) ITC 사이트에 공개한 판결문을 통해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 및 ITC의 포렌식 명령 위반에 따른 법정모독 행위를 고려할 때 LG 화학의 SK이노베이션에 대한 조기패소 판결 신청은 정당하다”고 밝혔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이 ITC 영업비밀침해 소송을 인지한 지난해 4월 30일부터 증거보존의무가 발생했다며 SK이노가 이 시점 이후에도 적극적으로 문서들을 삭제하거나 혹은 삭제되도록 방관했다고 판결문을 통해 지적했다.
ITC판결문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은 LG화학에서 전직한 직원들이 LG화학 고유의 배터리기술을 보유하고 이 중 일부는 SK이노베이션에서 유사한 업무에 배치됐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아울러 판결문에는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의 지식을 활용해 프로세스에 적용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고, 또한 SK이노베이션이 채용과정에서부터 LG화학 지원자들로부터 구체적인 배터리 기술 정보를 취득해 관련 부서에 전달한 점도 적시됐다.
결국 SK이노가 증거 보존 의무가 있는 상황에서도 LG화학과 관련된 문서 상당량을 고의로 삭제하거나 대상으로 삼았음이 논란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하다는 게 ITC 측 설명이다.
◆ ITC “범행 의도가 있는 고의적 증거인멸”
ITC는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과 관련된 문서보안점검과 삭제가 범행의도가 없는 통상적인 업무 과정이라는 주장도 정면 반박했다.
ITC는 “SK이노베이션은 통상적인 업무 과정에서 일어난 문서삭제라고 주장하지만, 증거에 따르면 이는 고의적 증거 인멸”이라며 “LG화학의 정보(영업비밀)를 탈취했다는 사실을 LG화학이 입증하는 것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시했다.
이어 “만약 통상적인 업무 과정에서 정당하게 문서삭제가 진행됐다면, 문서삭제를 위해 발송된 지시 내용을 없애려고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드러난 증거에 따르면, 문서보안 점검의 실제 목적은 LG화학 관련 정보를 포함한 문서를 제거(remove)하거나, 진짜 필요한 문서일 경우 문서명 또는 내용을 변경해 LG화학이 찾기 어렵도록 만들기 위한 행동”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SK이노베이션의 주장은 일관성이 없을뿐더러 타당하지도 않다”며 “결론적으로 SK이노베이션의 문서훼손 행위는 영업비밀탈취 증거를 숨기기 위한 범행의도를 가지고 행해진 것이 명백하다”고 강조했다.
◆ITC “SK이노 증거 인멸로 LG화학에 피해 끼쳐”
ITC판결문에는 SK이노베이션에 재직 중인 LG화학 출신 직원의 PC 휴지통에서 발견된 엑셀 문서가 증거자료로 공개됐다. 지난해 4월 12일 작성된 이 엑셀 시트에는 ‘LG사’ ‘L사’ ‘경쟁사’ 등 키워드가 포함된 LG화학 관련 삭제된 파일 980여개가 나열됐다.
또 내부 이메일에는 ‘LG회사에 대해 논의한 이메일을 모두 삭제할 것’, ‘테스트할 기회가 많지 않다면 해결방법은 경쟁사의 자료를 확보해 최대한 따라 하는 수밖에 없음’ 등의 문구도 발견됐다.
아울러 LG화학 출신 SK이노베이션 직원이 2018년 작성한 ‘이것이 유일하게 내가 갖고 온 정리된 자료’라는 제목의 내부 이메일에 “이런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나?”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와 함께 LG화학의 양극재·음극재 등 배터리 소재 관련한 상세한 레시피 자료가 담긴 자동차 모델별 정보 등이 엑셀 파일로 첨부돼 있었다.
ITC는 이와 관련해 “‘SK이노베이션은 침해당한 영업비밀이 실제로 영업비밀이 맞는지’, 삭제된 문서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고 주장했다”면서 “하지만 SK이노베이션이 LG화학이 보유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했다는 증거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몇 가지 예시만 봐도 LG화학의 영업비밀을 ‘사용’했을 연관성이 있었을 수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며 “LG화학의 정보가 실제 영업비밀이 맞는지와 관련해서도 의심의 여지가 없이 연관성이 있어 보이는 문서들도 삭제됐다”고 언급했다.
그러면서 “SK이노베이션의 증거인멸 행위 등 법정모독 행위로 인해 이번 소송은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적합한 법적제재는 오직 조기패소 판결”이라며 “이번 조기패소 결정의 목적은 다른 사건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유사 위반 행위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도 있다”고 덧붙였다.
◆희비 엇갈린 배터리 전쟁…‘판’ 바뀔 가능성은?
조기패소 판결이 내려지면서 SK이노베이션은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이의제기를 신청한 상태다. 이의제기는 재판부의 결정에 대해 재검토를 요청하는 절차다. ITC는 다음달 17일까지 이를 수용할지 결정해야한다.
ITC위원회가 올해 10월 ‘최종결정’을 내리면 LG화학의 2차전지 관련 영업비밀을 침해한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셀, 모듈, 팩 및 관련 부품, 소재에 대한 미국 내 수입 금지 효력이 발생한다.
예비결정이나 이번 결정이 바뀔 가능성은 적다. ITC통계자료(1996년 ~ 2019년)를 살펴보면 특허소송의 경우 약 90% 정도의 비율로 ITC행정판사의 예비결정이 ITC위원회의 최종결정에서 보존됐다. 특히 영업비밀소송의 경우 ITC행정판사가 침해를 인정한 모든 사건이(조기패소결정 포함) ITC위원회의 최종결정에서 그대로 유지됐다.
이에 따라 이번 영업비밀 소송에서도 ITC행정판사의 예비결정이 ITC위원회의 최종결정으로 그대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업계 전문가는 “경쟁사의 영업비밀을 사용하고, 이 문서들을 삭제하거나 숨기는 행위를 해왔다는 사실이 소송 과정에서 모두 드러났다”며 “이를 재판부가 인정하고 구체적인 사례도 기술됐다. 수년간의 탈취 내용과 증거자료 삭제가 드러난 이상 LG화학의 전체 피해 규모를 산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전했다. im9181@kuk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