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양기화의 인문학기행] 발트, 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기사승인 2020-04-06 02:33:26

뚱뚱이 마르가렛 탑 옆에 있는 성문, 수어 란나바라브를 지나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다보면 모양이 비슷하고 외벽의 색깔만 조금 다른 3채의 건물이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세 자매 호텔(Kolm Õde Hotell)이다. 중세 무렵 탈린의 동맥 역할을 하던 픽 거리(Pikk tänav)의 끝에 있는 이 건물들은 상인들의 주택으로 향신료, 고기, 곡물 등을 다루던 곳이다. 

지금 건물들은 15세기 무렵 지어졌고 19세기에 재건축됐다. 하지만 이곳에서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1362년에 처음 지어졌는데 피리타 수도원교회(Pirita kloostrikiriku)의 외관을 닮았다. 1372년 시의회 의원이던 리카르드와 요한네스 라이스(Richard ja Johannes Ryce) 등이 소유했다.

1415년 도공 한스 힐데브란딜레(Hans Hildebrandile)에게 넘어간 뒤로 몇 차례 주인이 바꼈다. 1860년부터 1940년까지 상인가문이던 안드레아 크리스티안 코호(Andreas Christian Koch), 오스카 코호(Oskar Koch) 그리고 한스 요아킴 코호(Hans Joachim Koch) 등의 소유했다. 1990년에는 원래의 모습에 가깝도록 모퉁이의 집 창문 의자를 복원했고 출입구에는 고가의 바로크 조각을 재건했다. 

2003년에 재단장해 객실 23개의 5성급 호텔인 세 자매 부티크 호텔(The Three Sisters Boutique Hotel)로 문을 열었다. 앞에서 보면 지붕 가까이에 한자동맹의 상인주택에서 볼 수 있는 도르래가 달려있는 등, 중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나, 내부 시설은 현대적 편의성을 갖추고 있다.

들보가 있는 천장, 지붕과 굴뚝 구조, 들보를 넣은 창틀, 석재로 된 정리장, 계단 등 전형적인 중세 주택이고, 맨 위층은 한자동맹의 전통에 따라 창고로 사용됐다. 중세에 사용되던 외부 굴뚝을 비롯한 난방 체계의 흔적은 없다. 모퉁이 집에서는 동물과 풍경 등 성경을 주제로 한 벽화와 돌조각 기둥 장식이 발견된다. 벽난로와 패널은 1856년에 벅스 회우덴(Buxhöwden) 백작이 제작해 팔던 제품이다. 

1856~57년 사이에는 건축가 크리스토프 아우구스트 가브러(Christoph August Gabler)가 맡아 외관을 의사-고딕 양식으로 바꿨다. 1997년 국립문화재동록원은 세 자매 호텔을 문화재 제3054호로 지정했다. 김영만 가이드는 1박에 120불 정도로 비싼 편이라면서 엘리자베스 여왕도 묵은 바 있다고 했다.

6시경 세 자매 호텔을 떠나 버스로 이동하는 도중에 마르가렛 공원에 있는 ‘끊어진 항로’ 추모탑(Mälestusmärk ‘Katkenud liin’)을 돌아봤다. 빌루 야아니소(Villu Jaanisoo)와 요르마 무칼라(Jorma Mukala)가 제작해 1996년 9월 27일에 개관한 이 추모탑은 1994년에 발생한 에스토니아 최대의 해난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하는 탑이다. 

RMS 타이타닉 호 해난사고에 이어 2번째로 큰 해난사고로 기록되는 사건이다. 평지에 있는 선로와 뚱뚱이 마르가렛탑이 있는 언덕 위에 있는 선로가 끊어진 채 서로를 향하는 모습을 나타낸다. 페리의 항로를 ‘선(line)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페리가 끊어진 항로에서 침몰한 것을 표현한 것 같다.

에스토니아 재난(Estonia katastroof)은 1994년 9월 28일 자정 무렵 에스토니아의 탈린을 출발해 스웨덴의 스톡홀름으로 가던 카페리가 핀란드의 투르크 해역에 있는 우토 섬(Utö saarest)에서 41㎞ 떨어진 바다에서 침몰한 사고다. 탑승하고 있던 승객 803명과 186명의 승무원 등, 총 989명의 탑승객 가운데 137명만이 구조됐고 95명은 시체로 발견됐으며, 나머지 757명은 그마저도 찾지 못하고 실종된 채 마무리됐다.

당시 사고해역의 날씨는 초당 15~20m의 바람이 불고 파도는 4~6m 높이의 파도가 치는 거친 날씨였다. 자정이 지난 1시경 큰 파도가 선수의 문을 강타하면서 덮개가 부서지고, 이어서 파도가 차량을 탑재하는 갑판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배가 순식간에 기울었지만, 객실에 있던 승객들은 쏟아지는 바닷물을 뚫고 갑판으로 올라갈 수 없었다.

불과 50분 만에 배는 다른 선박의 레이더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배가 침몰한 장소는 수심이 74~85m에 이른다. 발트 해는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해역으로 2000척의 선박이 상시 운항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선박이 화물선인 까닭에 탑승 인원이 거의 없어 구조에 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5척의 페리 가운데 2시 12분에 가장 먼저 도착한 마리엘라는 구명보트에 탄 13명을 구조할 수 있었다. 

최대 310명의 탑승객이 외부 갑판에 도달했지만 160명만이 구명정을 탈 수 있었다. 사고 해역의 당시 수온은 10~11℃로 구명정을 타지 못한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저체온증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 650명은 배가 침몰했을 때 여전히 배에 남아있었을 것이다. 

사고 후 피해자 유족들은 실종된 사람들을 찾아서 매장할 수 있도록 할 것과 재난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선박을 인양해달라고 요구했지만, 에스토니아 정부는 이런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사고해역의 수심이 74~85m에 달하기 때문에 작업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위험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들을 해저에 방치한다는 것도 문제라고 본 스웨덴 정부가 선박 전체를 현장에 묻을 것을 제안했고, 예비적 조처로 수천톤의 자갈을 현장에 투하했다고 한다.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해역의 수심이 50m에 불과했다고는 하지만 시계가 불량하고 유속이 빠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구조작업을 이어가 선체를 인양한 세월호와 대비되는 사후처리였다. 

1995년 스웨덴,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폴란드, 덴마크, 러시아 그리고 영국 등 사건과 관련된 국가들이 맺은 ‘에스토니아 협약 1995(Estonia Agreement 1995)’에서는 사고 지역을 신성한 장소로 선언하고 사람들의 접근을 금지했다. 하지만 조약서명국의 국민들에게만 구속력이 있다. 스웨덴 해군은 난파선 해역에서 일어난 2건의 다이빙활동을 발견한 바 있다. 

‘끊어진 항로’ 추모탑이 있는 마르가렛 공원을 출발한 버스가 선 곳은 에스토니아 국립 오페라극장(Rahvusooper Estonia) 앞이다. 에스토니아 국립 오페라단의 뿌리는 1870년에 음악과 드라마에 관련된 사람들이 창설한 ‘에스토니아 학회(Estonia Seltsi)’에 닿는다. 초반에는 노래, 춤, 코미디 등으로 구성된 작품들이 공연됐다. 

1907년에서야 최초의 오페레타가 공연됐는데, 프랑스 작곡가 에르베(Hervé, 실제 이름은 Louis Auguste Florimond Ronger이다)가 작곡한 맘젤레 니투쉬(Mam'zelle Nitouche, 위선자 처녀)였다. 1908년에는 첫 오페라 공연으로 독일 작곡가 콘라딘 크로이쳐(Conradin Kreutzer)가 작곡한 그라나다에서의 야영(Das Nachtlager von Granada)을 무대에 올렸다.

에스토니아 국립 오페라극장은 아르누보 건축가 아르마스 린드그렌(Armas Lindgren)과 위비 론(Wivi Lönn)의 설계로 1913년에 완공됐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인 1944년 3월 9일 소련 공습으로 파괴됐지만, 전후에 에스토니아 건축가 알라 코틀리(Alar Kotli)와 에드가 요한 쿠우식(Edgar Johan Kuusik)에 의해 복원돼 1947년 다시 문을 열었다.

대극장은 690석 규모이며, 극장 뒤쪽으로 두 날개 사이에 1991년에 지은 75석 규모의 음악홀, 겨울정원(talveaed)이 있다. 국립 오페라 극장 앞 정원에는 1905년의 혁명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서있다. 기념비에 적힌 유일한 글은 ‘1905’인데 건립 배경은 라트비아의 리가에 있는 ‘1905년 피의 일요일 기념비’와 같은 맥락을 가지고 있다.

에스토니아 국립 오페라극장 옆에 있는 건물은 에스토니아 연극 극장(Eesti Draamateater)이다. 1920년 문을 연 에스토니아 극장 감독 폴 셉(Paul Sepp)이 문을 연 개인 스튜디오로 출발했다. 1939년에 에스토니아 드라마 극장으로 이름을 바꿨다. ‘옛 도시 사람의 서점’이라는 뜻의 서점, 바날리나 라흐바 라아맛(Vanalinna Rahva Raamat) 옆 골목을 따라 올라가면 성니콜라스 교회가 있는 삼거리가 나오고, 오른쪽 길로 가면 탈린 시청이 있다.

탈린 시청(Tallinna raekoda)은 발트연안국가는 물론 스칸디나비아 전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고딕 양식으로 된 제일 오래된 시청건물이다. 1332년에 만들어진 부동산에 관한 책에는 커다란 지하창고(cellarium civitatis)가 있는 회의실(consistorium)이라고 기록돼있다. 1364년에는 극장으로 불리다가, 1372년에는 시청으로 불렸다. 문화 기념물 제1199호로 지정된 시청건물은 시장광장의 남쪽에 있다. 

시청의 건물은 회색 석회암으로, 지붕은 점토 기와로 만들어졌다. 넓은 지하실이 있는 2층 건물로, 서쪽 벽의 길이는 14.5m이며 동쪽 벽의 길이는 15.2m이다. 양쪽의 길이가 이렇게 다른 것은 시청건물이 적어도 5차례에 걸쳐 확장됐기 때문이다. 지금의 모습은 1402~1404년 사이에 갖춰졌다.

정면의 1층에는 비가 올 때 사람들이 몸을 피할 수 있도록 8개의 기둥이 떠받드는 아케이드를 뒀다. 기둥 가운데 하나에는 목줄과 수갑으로 된 차꼬가 달려있다. 시의 치안판다는 범죄자를 시청 기둥의 차꼬에 매달아 마을사람들로 하여금 모욕이나 조롱할 수 있도록 했다. 건물 오른쪽 문 위에는 도시의 문장을 걸었다. 정면의 시계 양쪽에는 각각 용머리의 석상이 조각돼있다. 

건물 서쪽에 있는 64m 높이의 팔각형 모양의 탑은 1227~1228년 사이에 그라프(G. Graff)가 르네상스 양식으로 고쳤다. 3조각으로 된 바로크양식의 첨탑을 올렸다. 탑 꼭대기에는 1530년에 설치한 풍향계 ‘늙은 토마스(Vana Toomas)’는 탈린의 명물이자 상징이다. 지금의 것은 모사품이고 원본은 탈린 박물관에 보관돼있다.

탈린 시청 앞 광장에서는 오늘 하루 난장을 열었던 모양으로 천막들이 어지럽다. 시청의 맞은편에는 매드 머피(Mad Murphy's)라는 오래된 아이리시 커피집이 있고, 그 옆으로 15세기 무렵 문을 열었다는 약국, 베발리 라에프텍(Revali Raeapteek)이 있다. 시청약국이라는 상호다. 

이 약국이 언제 문을 열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가장 오래된 기록에 따르면 1422년에 이미 3번째 주인이 약국을 운영했다고 한다. 1582년부터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한 헝가리계의 버차트(Burchart) 가문은 그야말로 약국의 역사라 할 수 있는데, 1911년까지 무려 10대 걸쳐 약국을 운영했다고 한다. 약국을 맡아 운영할 아들에게는 요한이라는 이름을 물려주는 전통이 있었다. 

10대손이 상속할 아들 없이 사망하자 1911년 그의 누이가 약국을 매각했다. 1층에 있는 현대화된 약국에서는 오래된 의료기기, 역사적인 화학도구, 기타 호기심을 끌만한 것들을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벽에는 1635년에 시작된 버차트 가족의 문장이 새겨져 있다. 백합 사이에 왕관이 있고 장미 아래에 그리핀이 있다.

글·양기화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진료심사평가위원회 평가책임위원

1984 가톨릭의대 임상병리학 전임강사

1991 동 대학 조교수
1994 지방공사 남원의료원 병리과장
1998 을지의대 병리학 교수
2000 식품의약품안전청, 국립독성연구원 일반독성부장
2005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 연구위원
2009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상근평가위원
2020 현재, 동 기관 평가책임위원
오준엽 기자
oz@kukinews.com
오준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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