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야 미술에세이](3) 전북근대미술을 이끌어온 작가들-남원출신 이경훈

[장미야 미술에세이](3) 전북근대미술을 이끌어온 작가들-남원출신 이경훈

기사승인 2020-04-20 17:00:52

글 : 장미야 조형미술학(문학박사)박사. 서양화가

2020년 4·19혁명 60주년을 맞이해 문재인대통령은 재임 중 처음으로 참석한 기념식장에서 “4·19혁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한 국가 중 최초의 민주화운동이고 전 세계학생운동의 시작이기도 하다”면서 “정부는 그 의미를 특별히 기리고 4·19혁명의 정신을 인류에게 남기기 위해 4·19혁명 기록물의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 등재도 추진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전북 근대미술의 선구자중 한분이셨던 동창 이경훈 작가의 작품을 생각하게 한다. 모든 예술가의 작품 속에는 그 자신의 사고방식, 경험, 인격 등이 반영되거나 아니면 그것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다. 그보다도 선천적인 영향을 받는 요인들이 있는데 그것은 민족성, 민족의 역사나 문화 혹은 그 예술가가 태어나 자라난 지리적 조건이다.

동창 이경훈은 1921년 전북 남원군 남원읍 죽항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 자란 시기는 한국의 역사적으로도 불행했던 아픔을 안고 있던 시대였다. 1943년 동경에서 미술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 1947년에 익산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으나 6·25 전쟁으로 인해 모든 작품이 소실되는 불운을 겪게 됐다. 종전 후에는 어려워진 가정형편 때문에 교직에 몸담을 수밖에 없게 돼 그의 왕성한 창작활동은 기대할 수 없게 됐다.

이경훈, 4.19의노도, 100.0×80.3cm, 캔버스에 유채, 1965, 사진만 존재.

동창 이경훈의 작품 '4·19의 노도'에서 시민과 학생들은 태극기를 들고 싸웠다. 최초 10만에서 20만 명까지 모여 들었다고 한다. 경찰은 시민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무차별 발포를 해 사망자가 104명이 발생하게 됐다. 민주주의 외침이 피의 화요일이 되었던 그날의 모습을 작품으로 남겼다.

우리 나갈 길(우리 나갈 길) 멀고 험해도(멀고 험해도)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기리라. 4·19 기념식에서 나오던 2020 상록수 가사처럼 민주국가의 민주성, 투명성을 외치던 민중들의 태극기에서 절규와 민족의 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민족주의의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는 역사의식이 분명했고 작품 세계는 관전아카데미즘의 영향을 받은 사실주의를 표현했다. 이 작품은 현재 흑백사진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두 점의 '자화상'은 이러한 고전적인 형식에 바탕하고 있어 렘브란트(Harmensz van Rijn Rembrandt, 1606~1969)의 자화상을 연상케 한다. 빛의 과도한 포착과 표현, 포즈의 정적인 분위기, 암갈색조로 깊은 공간을 만들어 내는 배경처리 등이 그러하다. 다만 이경훈의 '자화상'에서는 그 자신의 독특한 조형의지가 배어 있다. 그의 당당함과 자신감이 인물의 표정에서 묻어나며 화면 밖을 응시하는 듯한 깊은 시선처리 등에서 그러한 조형의지를 읽을 수 있다. 그 작품이 비록 자화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을 보편적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으며 하나의 의도된 성격의 소유자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자신의 얼굴 모습에 자신이 원하는 당위적이고 미래적인 이상형이 내포되어 있는 등 화가로서의 자신감이 배어 있는 것이다.

이경훈, 자화상1, 46×65㎝, 캔버스에 유채, 1966, 개인 소장.
이경훈, 자화상2, 41.5.×53㎝, 캔버스에 유채, 1964, 개인 소장.

동창 이경훈의 자화상에 대한 글을 1956년 중동교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거울을 곧잘 들여다보는 버릇이 있고 자화상은 내가 좋아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렇다고 내가 홍안미남이라서가 아니고 자아의식이 높아서가 아니다. 단지 표현대상으로 편리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며 내성적인 나의 성격의 소치인가 한다. 검붉은 얼굴빛은 산골에서 태어나 맑은 태양광선에 가산혼합된 것이고 길게 두는 머리는 자연무성을 좋아하는 주관에서 짧게 하여 손질하고 다듬질하는 치사가 싫어서이다. 코는 원래 서양화를 전공할 때부터 서양문화에 접촉해서인지 나도 모르게 그네들 코와 닮아졌나 보다. 시각예술을 하려면 선천적으로 클 수밖에 없는 눈이기에 컸는데 학생들이 말을 안 들어 매서워졌을 뿐 눈을 한번 부릅뜨면 매를 들지 않아도 잘 순종들 하더군. 크기와 위치가 알맞게 간직한 귀는 귓문이 너무 넓어서 인지 친구와 술잔이나 넌짓 하면 인심을 막 쓰지요. 가난한 나로서는 적게 먹기 위하여 입을 작게 다물었으며 요즈음 미간에 두 줄기 금이 나타났으니 과거의 풍상고난을 겪었다는 발현이리라.

그가 서울 부천 중동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할 때 ‘중동교지, 1959’에 밝힌 자화상에 대한 소회는 자신의 얼굴 그 자체의 묘사에만 만족하지 않고 그 속에 자신의 삶의 애환도 담아내려는 고뇌어린 노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나의 외관상의 얼굴을 보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리려는 것도 아니었다. 괴로울 때나 즐거울 때나 섣달 그믐날 내 생일날 등…. 기회만 있으면 나는 거울을 보고 내 얼굴을 그린다. 고달픈 나에게는 탄식과 자위의 순간이 되기도 하고 기쁨의 나에게는 안수명상에 잠기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눈을 통한 내 인식과 감정은 나의 두뇌에 반영되어 나라는 생활체 나의 생명을 보게 한다. 그러다가 내 얼굴은 점점 미적의식, 미적감상이 조화되어 우주와 생명의 존재법칙을 느끼게 한다. 나는 그때 미의 감각요소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안다. 얼마동안 시간이 흘렀는지 자화상과 나와의 교류 속에 무엇인지 내 육체에 쌓이고 쌓인 것들이 풀리는 것 같고 붓을 든 손은 광란의 운동을 점점 늦추기 시작한다. 나는 화면에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재미있는 생각을 찾아내기도 한다.

따라서 그의 자화상은 자신 얼굴의 은폐된 현상으로 파악된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굵은 터치와 붓 자국은 자신의 강인함을 은근히 드러내는 자화상 2점이 대표적인 예시라고 할만하다.

이경훈의 초기 작품은 일본 유학과 함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일본 화풍을 벗어나기는 어려웠지만 색채에서 자연주의적 향토성이 그대로 드러난다. 풍경화는 종교적 성향과 결합하게 되고, 이에 따라 향토색은 자연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자연의 순리를 따라갈 것과 그러한 자연의 순리를 그려내는 것을 작품의 미덕으로 생각한 그는 자연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한 우리의 산하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일본화와는 달리 한국의 고향 산천을 빛과 색으로 자연미를 파악해 한국적인 인상주의 분위기를 담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작품의 의지가 향토색과 연결돼 전북의 자연을 담아내고 있다.

홍재희 기자
obliviate@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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