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키뉴스] 강한결 기자 = 며칠 전의 일입니다. 기자는 보통 유튜브 영상을 보며 소소한 힐링으로 하루를 마감합니다. 그 날도 새벽 한 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보며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휴대폰을 내려 놓으려던 찰나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 영상을 툭 던졌습니다. 1988년 MBC 대학가요제의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 '무한궤도'의 '그대에게' 영상이었습니다.
전부터 좋아했던 노래였기에 홀린 듯 추천 영상을 눌렀습니다. 지금은 이 세상을 떠난 '마왕' 신해철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놀랐습니다.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노래, 패션이 전혀 촌스럽게 느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역시 유행은 돌고 도는 걸까요?
어딜 가나 복고풍을 의미하는 '레트로(Retro)'라는 단어를 찾아볼 수 있는 세상입니다. 방송부터 유통산업까지 '레트로'는 한국 대중문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라 봐도 무방한 것 같습니다. 레트로 열풍은 게임업계에도 막대한 파급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리니지M', '바람의나라: 연(바람:연)', '리니지2M', '뮤 아크엔젤', '라그나로크 오리진', '카트라이더 러쉬플러스(카러플)'. 구글 플레이 매출 순위 1위부터 6위까지 순위입니다. '왕년'에 한가락 했던 IP(지적 재산권)의 화려한 귀환이 새삼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최근 출시되는 게임 중에서는 도트 그래픽, 8비트(옛날 게임기들 내지는 콘솔들의 음향효과를 사용해 만든 음악) BGM을 사용해 1990년대 감성을 재현한 작품도 여럿 있습니다. 그래픽과 음향 기술이 날로 발전하는데, 다운그레이드된 감성을 선호하는 기이한 현상.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레트로 붐'을 맞아 게임업계는 과거 자사가 개발한 IP를 재활용해 모바일로 이식하는 전략을 내세웠습니다. 이 경우 원작을 즐기던 유저들을 끌어오기 쉽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IP 기반 리메이크 게임은 과거에도 꾸준히 출시됐습니다. 하지만 올해 들어서는 이같은 흐름이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스타트를 끊은 것은 넷마블이었습니다. 지난 3월 넷마블은 MMORPG와 배틀로얄을 결합한 'A3:스틸얼라이브'를 출시했습니다. 이 작품은 2002년 애니파크(現 넷마블앤파크)에서 제작한 'A3'의 IP 기반 모바일 게임입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원작의 인지도가 낮은 'A3:스틸얼라이브'가 레트로 열풍을 촉발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언급할 게임은 오늘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넥슨이 지난 5월 선보인 '카러플'은 게임업계에 본격적인 '레트로 열풍'을 퍼뜨렸습니다. '카러플'은 원작을 경험해보지 못했던 10대부터 트랙 '빌리지 손가락' 시간 단축을 위해 수없이 많은 랩을 돌았던 2030유저도 사로잡았습니다.
'카트라이더' PC버전에서 '무지개 장갑'을 달았던 기자의 지인은 "아마 많은 유저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는데, 현재 PC버전 '카트라이더'보다 '카러플'이 더 옛날 원작에 가까운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참고로 기자는 드리프트에 능숙하지 못해 아이템전을 선호하는 유저였습니다. 기자를 놀리던 지인은 "우리가 예전에 중학교 끝나고 PC방에서 '카트'하던 느낌을 '카러플'하면서 받는다"고 말한 뒤 아련한 눈빛으로 생각에 잠겼습니다.
'카러플'로 재미를 본 넥슨은 더 적극적으로 게이머들의 추억을 자극했습니다. 후속 주자는 지난 15일 출시된 '바람:연'이었습니다. 혹시 TV에 나온 '바람의 나라:연' 광고를 본 적 있으신가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세 명의 친구는 PC방에서 '바람의 나라'를 플레이합니다. CRT모니터와 옛날 디자인의 칠성사이다가 우선 눈에 띄네요. 친구들의 머리스타일도 시대를 가늠케 합니다. 문희준 스타일이라 불리던 5대 5 가르마, '마수리' 스타일 브릿지 염색까지. PC로 '바람의 나라'를 즐기던 이들은 어느새 40대가 됐고, 모바일로 '바람:연'을 플레이하며 감격스러워 합니다.
'카러플'과 '바람:연'은 수익적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습니다. '카러플'은 지난 17일 기준으로는 누적 유저 수도 1500만명을 돌파했고, 출시한 지 두 달이 지났음에도 꾸준히 매출순위 10위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바람:연'의 상승세는 더욱더 가파른 수준입니다. 누적 다운로드 수도 260만회를 넘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주목해야 할 점은 구글 플레이 매출순위입니다. '바람:연'은 '리니지2M'을 제치고 매출순위 2위를 차지했습니다. 지난해 11월 '리니지2M' 출시 이후 구글플레이 매출순위 1·2위는 항상 '리니지' 형제의 몫이었습니다. '넥슨은 다람쥐를 뿌려라'라는 유명 어록으로 3040 게이머의 향수를 자극한 '바람:연'이 대형사고를 친 것이죠.
'추억의 상품화'는 당분간 게임업계의 메인 스트림으로 굳어질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카러플'과 '바람:연'으로 대박 난 넥슨은 향후 '테일즈위버'와 '마비노기'를 모바일화할 계획입니다. 이에 질세라 엔씨소프트의 자회사 엔트리브소프트도 지난 2일 신작 발표회 'TRINITY WAVE'에서 '트릭스터', '팡야'의 모바일 버전을 내놓겠다고 밝혔죠.
앞서 말한 것처럼 레트로는 한국 대중문화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지고 있습니다. 특히 방송 쪽으로 가면 이같은 흐름이 더 두드러지죠. MBC 예능 프로그램 '놀면 뭐하니'에서 시작된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의 인기를 보면 이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지난해 11월부터 지난 3월까지 방송된 JTBC의 음악 예능프로그램 '슈가맨3'는 레트로 열풍을 주도하다시피 했습니다. 시즌 3 최대 수혜자가 된 양준일, 싸이월드 감성을 다시 일깨워준 프리스타일, '버스안에서'의 자자까지. 추억의 뮤지션을 2020년으로 소환했습니다.
'슈가맨3'를 보다 궁금했습니다. 도대체 10대들은 이 노래를 어떻게 알고 공감할까요. 올해 대학교 1학년인 20학번 신입생들은 2001년에 태어난 21세기 인류입니다. 물론 유튜브에서 검색 한 번이면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이기에 '어떻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당시의 시대감성을 공감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습니다.
얼마 전에야 이 의문을 작게나마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기자는 지난달 중·고교생을 대상으로 미디어 교육을 진행하는 후배를 만났습니다. 제 얘기를 들은 후배는 "유행은 지속적으로 돌고 도는 것"이라며 "지금 10대들은 아날로그 문화를 '힙(hip)'하다고 생각한다"고 얘기했습니다. 이제는 레트로를 넘어 복고를 새롭게 즐긴다는 개념의 '뉴트로(New+Retro)'가 통상적으로 쓰이고 있는데, 지금의 10대는 '슈가맨3'에 나온 노래를 뉴트로로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게임 얘기로 돌아오겠습니다. 후배와 했던 이야기를 떠올리니 '바람의 나라'를 해보지 않은 10대와 20대 초반 유저가 '바람:연'을 즐기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뉴트로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040 유저에게 도트그래픽과 4방향 조작 시스템은 추억의 전유물이지만, 3D 그래픽에 익숙한 10대와 20대 초반 게이머들에게 이러한 시스템은 오히려 참신하게 다가오지 않을까요.
다만 이러한 레트로 열풍을 바라보며 마음이 불편한 부분도 있습니다.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므두셀라(노아의 할아버지)는 969살까지 산 노인입니다. 성경에는 그가 나이가 들수록 과거를 회상할 때 좋은 기억만 떠올리고, 좋았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는 기록이 있는데요. 이를 바탕으로 '므두셀라 증후군'이라는 표현이 만들어졌죠.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현실이 힘겨울 때 좋았던 과거로 회귀하려는 경향이 있기 마련입니다. 경기 침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회 갈등까지 2020년을 살아가는 우리는 너무나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요. 결국 이같은 모순으로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화하기도 합니다.
김난도 서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소비자학과 교수가 집필한 '트렌드 코리아 2019'에는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기술의 편의성과 반비례해 자기 통제권을 잃어가며 무력감에 찌든 N포세대에게 과거에 대한 동경심은 잠시나마 힘든 현실을 회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준다. 80년대를 겪지 않은 1020세대가 그 시절을 동경하는 것은 장밋빛 미래가 없는 현실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들에게 뉴트로는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설렘이다."
현실의 팍팍함으로 인해 과거를 미화하고 그리워하는 중장년층, 태어난 이후 한 번도 '낭만적 순간'을 경험하지 못하고 과거를 동경하는 청년층. 대중문화를 관통한 레트로 열풍이 반가우면서도 씁쓸함을 곱씹게 되는 이유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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