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해결 VS 일상 유지

사건 해결 VS 일상 유지

사건 해결 VS 일상 유지

기사승인 2020-08-27 09:21:02

[쿠키뉴스] 한성주 기자 =연차가 가장 낮은 사원이 임원에게 성희롱을 당했다. 신체 접촉이나 물리력을 사용한 추행은 없었다. 임원은 식사 자리에서 사원에게 술을 권하며 성적 수치심을 일으킬 만한 발언을 했다. 사원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고민이 이어진다. 사원에게 상황을 해쳐나갈 용기를 줄 ‘믿을 만한 구석’은 없다.

“내가 들은 말이 성희롱이 맞나?” 사원은 자신의 귀부터 의심한다. 까마득한 상사인 임원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애쓴다. 사원을 위해주는 임원의 깊은 뜻을 파악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 자신이 과민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심하며 본능적으로 느꼈던 불편함의 정체를 탐구한다.

“문제를 제기해도 될까?” 사원은 자신이 임원의 발언을 지적할 용기도 얻지 못한다. 성희롱 발언은 업무 외 자리에서 나왔는데, 회사가 개입해서 문제 상황을 조율해줄 의무가 있는지 모르겠다. 애초에 회사에 이런 문제를 예방·징계하는 제도가 없을 것 같다는 회의감이 든다. 동료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조언을 구하기도 어렵다. 회사에서 성희롱 사건이 소문나는 것도, 상사를 뒤에서 험담한다는 오해를 받는 것도 무섭다.    

“상황이 더 나아질까?” 사원은 문제를 제기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는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고민하며 흘려보낸 며칠간 임원은 이미 자신의 발언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임원이 자신의 발언이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정도로 높은 수준의 성인지감수성을 가졌을 것으로 기대되지도 않는다. 

“이전처럼 출근할 수 있을까?” 사원은 사건을 공론화한 이후의 상황을 상상하며 고발을 단념한다. 모든 고민을 물리치고, 없는 용기를 끌어 모아 임원에게 사과를 받아낸들, 그 대가가 너무 크다. 사원은 자신이 조직을 어수선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위축된다. 회사와 동료들이 이전과 같은 호의를 보일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다. 사원의 눈에도 자신보다는 임원이 회사의 경영에 중요한 인물이다. 회사가 전적으로 사원을 감싸줄 것이라는 기대는 생기지 않는다.

결국 사원은 “나 하나만 참으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사원은 행복한 결말이 보장되지 않는 모험을 선택할 수 없는 보통사람이기 때문이다. 분하고 답답하지만, 공론화로 일어날 소동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달마다 들어오는 월급과 원만한 동료관계는 너무나도 소중하다.

이렇게 피해를 감내한 사원들은 전국에 수없이 많을 것이다. 고용노동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직장 내 성희롱 익명신고센터에는 717명의 신고가 접수됐다. 한 달 평균 60명, 하루 평균 2명이 도움을 청한 셈이다. 가해자의 80%는 사업주·대표이사·상사·임원 등 조직에서 강한 권한을 가진 위치에 있었으며, 피해자는 대부분 여성이었다. 

717명의 신고자들은 소중한 일상을 지켜냈을까. 피해자들은 언제까지 사건의 해결과 일상 사이에서 양자택일의 고뇌에 빠져야 할까.

castleowner@kukinews.com
한성주 기자
castleowner@kukinews.com
한성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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