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박근혜 사면, 정권 피해자들에게 물었다

이명박·박근혜 사면, 정권 피해자들에게 물었다

"국민이 바로 잡은 정의 허물어트리면 안돼"

기사승인 2021-01-15 06:20:02
▲대법원은 14일 국정농단 사건 등과 관련 전직 대통령 박근혜씨에 대한 징역 20년형을 확정했다. 박태현 기자
[쿠키뉴스] 이소연 기자 =지난 2008년부터 지난 2017년까지. 누군가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는 이유로 정부 지원에서 소리 소문 없이 배제됐다. ‘빨갱이’라 손가락질받고 팩스 한 통으로 노동조합 지위가 박탈됐다. 공권력에 짓밟힌 것도 모자라 ‘재판거래’의 대상이 된 이들도 있었다.

▲전직 대통령 이명박씨. 박태현 기자 
9년여의 세월 동안 국가의 수장이었던 두 전직 대통령의 유죄가 확정됐다. 대법원은 14일 이른바 ‘국정농단 사건’ 관련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등의 혐의를 받는 박근혜씨의 유죄를 확정,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 이명박씨는 앞서 뇌물수수와 횡령으로 징역 17년형을 확정받았다. 형이 확정됨에 따라 두 사람의 사면 조건도 갖춰졌다. 일각에서는 사면 논의가 본격적으로 불붙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이들에 대한 사면은 이뤄져야 할까.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피해자’로 불리는 이들의 의견을 물었다. 

▲2017년 9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위원회의 대국민 활동보고 회견에서 진상조사소위원장 조영선 변호사가 조사 경과를 보고하고 있다. 연합뉴스

◆“관리 명단 규모만 2만1362명” 9년에 걸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지난 2018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및 제도개선위원회에 따르면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 블랙리스트 관리 명단 규모는 2만1362명에 달했다. 이 중 사찰과 검열, 지원배제 등의 실제 피해를 입은 개인 또는 단체는 9273명에 이르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당시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좌파 연예인 대응 TF’를 조직, 블랙리스트를 관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참석하거나지지 의사를 밝혔던 이들이 주로 불이익을 받았다. 배우 문성근·김규리·권해효, 방송인 김미화·김제동 등이 대표적이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쿠키뉴스 DB
박근혜 정부에서는 블랙리스트 작성·운용의 주 무대가 청와대로 바뀌었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지시 아래 청와대 정무수석실과 교육문화수석실,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등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는 의혹이다. 세월호 시국선언에 나선 문학인, 문재인·박원순 당시 후보의지지 선언을 했던 문화·예술인 등 배우와 작가, 영화감독, 만화가, 요리사, 사진가 등이 포함됐다. 

▲지난 2017년 4월19일 오전 헌법재판소 앞에서 '문화계 블랙리스트 헌법소원 청구서 제출'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합뉴스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송경동 시인은 두 전직 대통령의 사면에 대해 “말이 되지 않는다. 국민이 나서서 바로 잡은 정의를 허물어트려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오히려 사면·복권돼야 하는 사람들은 이명박·박근혜 시절 공권력의 탄압을 받았던 피해자들”이라며 “국가의 사과나 재발방지책 등을 전혀 약속받지 못했다. 진상규명도 여전히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전교조 조합원들이 지난해 9월3일 오후 서초동 대법원에서 열린 법외노조 통보 처분 취소 소송 상고심 선고를 마치고 법정을 나와 만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팩스 한 통에 ‘노조 아님’ 통보” 전교조, 투쟁 끝 지위 되찾았지만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도 이명박·박근혜 정권 아래서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이명박 정권 당시 국정원은 전교조를 상대로 반대 시위를 벌이는 단체에 1억7000여만원을 지원하는 등 전교조 비난 공작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권의 ‘전교조 흔들기’는 박근혜 정권에서 정점을 찍었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정권은 해직 교원 9명이 가입돼 있다는 이유로 전교조에 “노조가 아니다”라는 처분을 팩스로 통보했다. 전교조는 지난해까지 7년 동안 ‘법외노조’로 활동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노조 전임자로 활동하던 교사 34명이 학교와 교육청에서 해직됐다. 

노조 지위를 회복하기 위한 법적 투쟁에 나섰지만 지난했다. 1·2심 모두 법외노조 처분이 적법하다고 봤다. 지난 2016년부터 대법원에 계류됐지만 지난해까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문제는 더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전교조 법외노조 사건 판결로 박근혜 청와대를 달래려 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른바 ‘재판거래’다. 전교조가 사법농단의 희생자였다는 비판이 빗발쳤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가 지난해 5월20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전교조의 법외노조 취소 기자회견을 열고 피켓을 들고 있다. 박태현 기자 
지난해 9월 전교조는 법적 지위를 다시 회복했다. 대법원은 박근혜 정부 당시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이 위법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른 후속 조처로 전교조 해직 교사 33명은 복직됐다. 나머지 1명은 정년 퇴임했다.

법외노조 처분으로 해직됐던 정한철 전교조 신임 부위원장은 “사면을 논의하는 것에 대해 전교조 조합원 모두 분노하고 있다”며 “전교조에 대한 탄압은 이명박 정권 때부터 기획해 박근혜 정권에서 완결된 거다. 사과 한마디 듣지 못했는데 사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꼬집었다. 정 부위원장은 “두 정권이 전교조에 씌운 ‘흑색선전’으로 인한 피해가 여전하다”며 “국민의 배척을 받는다는 자괴감에 탈퇴를 택한 조합원 숫자만 2만명에 가깝다. 가입자 수도 예전 같지 않다”고 토로했다. 

▲쌍용자동차 평택공장. 연합뉴스 

◆트라우마 딛고 다시 일어나는 쌍용차…100억대 손배소 해결될까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트라우마’다. 회생절차를 밟던 쌍용자동차는 지난 2009년 4월 경영정상화 방안으로 2646명의 인력감축을 택했다. 총인원의 36%에 달했다. 노조의 반발로 파업이 시작됐다. 4시간의 부분파업은 굴뚝 농성, 점거 파업으로 커졌다. 법원은 노조원이 점거한 공장을 회사 측에 인도하라는 강제집행명령을 내렸다. 경찰은 3000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노조를 압박했다. 노조원들도 화염병 등을 던지며 이에 맞섰다. 대치는 길어졌고 식량·물 반입도 막혔다. 경찰은 같은 해 8월4일부터 경찰특공대를 동원,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대부분의 공장이 경찰에 의해 장악됐다. 노조와 사측은 협상을 진행했고 무급휴직, 희망퇴직, 정리해고 등이 이뤄졌다. 

노동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지난 2010년 정리해고자 중 156명이 해고무효소송을 제기했다. 지난 2014년 2월 항소심에서 해고가 무효라는 판결이 나왔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대법원은 ‘해고는 적법했다’는 취지의 판단을 내렸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간부들이 2014년 11월13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2009년 쌍용차 대량해고 사태는 긴박한 경영상 필요에 따른 것'이라는 취지의 판결이 나온 직후 눈물을 흘리는 모습. 연합뉴스
정권이 바뀐 후, 상황은 반전됐다. 지난 2018년 사법농단 사건이 수면 위로 오르면서 당시 대법원의 판결이 ‘재판거래’의 결과였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같은해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는 “쌍용차 노조 파업 진압 당시 경찰 공권력 행사에 위법성이 있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이명박 청와대에서 직접 ‘강력 진압’ 지시를 내렸고, 인터넷 대응팀을 만들어 노조의 폭력성을 부각하는 글을 게재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대법원장과 경찰청장은 재판거래 의혹과 강제진압에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다. 해고됐던 노동자들은 노사 합의에 따라 일터로 복직했다. 떠나간 동료는 돌아오지 못했다. 파업과 법정 다툼의 과정에서 노동자와 그 가족 30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업과 관련해 정부와 사측이 제기한 100억대 손배소도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정부는 강제진압을 사과했지만 손배소는 철회하지 않았다. 사측은 정부가 철회하지 않아 소송을 거둘 수 없다는 입장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5월4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중 마지막 복직 대상 노동자들이 경기 평택시 쌍용자동차 본사 공장 앞에서 첫 출근을 하며 손을 흔들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김득중 민주노총 금속노조 쌍용차지부장은 “두 전직 대통령으로 인해 아직도 과거의 트라우마를 호소하는 동료들이 있다. 쌍용차 사태와 관련 사과는커녕 어떠한 입장도 들은 적 없다”며 “촛불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 사면을 논의하는 것은 얼토당토않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지부장은 “쌍용차 사태 당시 경찰의 무자비한 진압을 보며 ‘우리가 국민이 맞나’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며 “참담했던 시간이 저와 당사자, 가족 모두에게 트라우마로 생생하게 남아있다. 100억 넘는 손배소 판결을 기다리며 하루하루 가슴 조이며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강제동원 피해자와 유가족, 관련 단체들이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행진하고 있다. 박효상 기자 

◆“조사위원회 없애고 재판마저 지연 시켜” 강제동원 피해자의 울분 

지난 2004년 11월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출범했다.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국가 차원의 첫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정부로부터 공식 인정을 받게 됐고 일부 위로금도 지급됐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국적포기서’까지 던지며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왔던 결과였다.

▲지난 2017년 8월12일 서울 용산구 용산역 앞 광장에 강제동원 노동자상이 세워졌다. 쿠키뉴스 DB
그러나 이명박 정권으로 넘어오며 위원회는 점점 힘을 잃었다. 한시적 기구가 돼 6개월~1년6개월마다 시한 연장을 국회로부터 승인받아야 했다. 강제동원 피해 사실을 조사할 인력도 계약만료로 위원회를 떠났다. 박근혜 정권 하인 지난 2015년 “아직 아버지의 유해를 찾지 못했다”는 피해 유족의 외침에도 위원회는 결국 해산됐다.

흐지부지된 것은 진상조사만이 아니었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판결 또한 긴 시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이춘식씨 등 피해자 4명은 지난 2005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서울중앙지법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지난 2012년 5월24일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 책임은 일본기업에 있다”며 원고 승소 취지로 파기환송했다. 이후 파기환송심에서 “피해자 1명당 1억씩 손해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으나 대법원의 상고심 판단은 오랜 기간 나오지 않았다. 해당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오지 않으면서 강제동원 관련 다른 15건의 재판도 줄줄이 중단됐다. 이후 판결 지연의 배후에 사법농단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강제동원 피해자 이춘식씨가 배상 판결 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박효상 기자
지난 2018년 10월 대법원은 이씨 등 강제동원 피해자 4명에게 1인당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승소 판결을 지켜본 이는 이씨 단 한 명뿐이었다. 원고로 참여한 피해자 4명 중 3명이 세상을 떠났다.     

강제동원 피해 유족이자 피해자들의 재판을 지원해온 A씨는 “피해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고 수십년을 노력했는데 이를 사법농단으로 무마시키려 해 충격이 컸다”며 “지금까지도 지연된 재판으로 인해 피해자와 유족들이 고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강제동원 진상규명 등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차근차근 긴 시간을 두고 해결해야 하는데 그냥 끝나 버렸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soyeon@kukinews.com
이소연 기자
soyeon@kukinews.com
이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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