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27km의 한양도성은 역사문화도시 서울의 랜드마크
- 현존하는 전 세계 도성 중 가장 오랫동안(511년) 도성 기능 수행
- 조선시대 성벽축조 변천사 고스란히 담아
- 일제강점기 성벽, 성문 훼철, 현재 70% 보수·복원
- 10회 연재 통해 도성의 과거와 현재 풀어내
- 성곽길역사문화연구소 최철호 소장과 함께하는 순성길
뭉게구름 가득한 지난 13일 아침, 최 소장과 경복궁역에서 만나 인왕산 성곽길을 향했다.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기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 최 소장과 함께 10여 분 쯤 걸었을까, 어느새 인왕산 초입 수성동 계곡에 도착했다. 계곡에는 며칠 전 내린 비에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제법 힘차다. 오염원이 없는 계곡물은 맑고 투명하다. 돌 틈 사이로 가재가 얼굴을 내밀더니 이내 몸을 감춘다. 활짝 핀 진분홍 철쭉 뒤로 산새들 울음소리와 물소리가 자동차 소음을 삼킨다. 도심 빌딩 숲을 뒤로하고 산 정상을 바라보니 길게 이어진 한양도성 성곽길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불과 15분 걸었을 뿐인데 물소리, 새소리, 바람소리가 온 몸을 감싼다.
서울의 성장과 변화를 온몸으로 겪어낸 한양도성은 길이가 18.627㎞로 서울시 5개구를 아우른다. 쿠키뉴스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역사도시 서울을 익히고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한양도성 둘러보기(순성)를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간 중간 일러스트와 함께 사진도 충분히 게재 한다. 연재 순서는 아래와 같다.
-연재 순서
① 보신각종이 울리면 한양은 깨어난다.
② 백성의 바람을 하늘에 고하다!
(사직단에서 인왕산 선바위까지)
③ 겸재 정선, 인왕산 바라보며 인생을 회고하다.
(수성동계곡에서 무계정사까지)
④ 궁궐이 발아래“조선 최고의 관광, 순성(巡城)놀이”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⑤ 성곽따라 이어진 성곽마을 이야기
(와룡공원에서 낙산공원까지)
⑥ 한양도성의 문은 모두 몇 개일까?
(한양도성박물관에서 장충동골목길까지)
⑦ 우리 손으로 훼손한 한양도성
(장충단에서 N서울타워까지)
⑧일제가 할퀴고 우리가 덧낸 남산
(국사당 터에서 통감관저 터까지)
⑨ 대한제국 서구에 문 열다.
(숭례문에서 돈의문 터 까지)
⑩ 한양도성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될까?
“함께 걸어요” 한양도성 순성길
<1> 보신각종이 울리면 서울은 깨어난다.
한양도성의 정문격인 숭례문(崇禮門)과 인근 소의문(昭義門) 앞에는 어둠이 채 가시기 전부터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서성이는 백성들과 팔도에서 올라온 싱싱한 농수산물을 실은 우마차가 길게 줄지어 서있다. 그 중에는 과거를 치르기 위해 상경한 진사로부터 어리둥절, 처음 한양 나들이에 나선 사람들, 도성 안에서 근무하는 관리들과 상인들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성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디잉~ 딩~ 디딩~”
마침내 새벽 4시 파루(罷漏)가 되자 한양의 중심에 위치한 보신각에서 33번의 종이 울리고 성문이 활짝 열린다.
28번 울리는 인정(人定)의 종소리와 함께 성문이 닫히고 도성 안에는 통행금지가 시작되고, 파루(罷漏)의 종이 울리면 한양은 잠에서 깨어났다.
밤 10시 인정에 28번의 종을 치는 것은 우주의 일월성신 28 별자리에 밤사이 안녕을 기원한 것이다. 새벽 4시 오경에 33번의 종을 치는 파루(罷漏)는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무병장수, 평안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600년이 지난요즘도 매년 새해맞이로 보신각 종을 33번 타종하는 이유다.
백악산 정상의 창의문을 제외한 4대문과 4소문 밖에서 줄을 서 있는 백성들은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전 현판의 글을 소리 높여 읽는다. 숭례문(崇禮門) 밖 한강을 건너온 사람들은 ‘예절을 숭상하라’는 글을 또박또박 읽으며 종소리에 맞추어 성문 안으로 들어간다. 마포나루 생선과 소금을 가져 온 칠패시장 상인들 역시 소의문(昭義門) 현판에 ‘의로움을 빛나게 하라’는 글을 읽으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했다.
조선의 수도 한양도성은 성문을 중심으로 팔도로 이어진 길들은 사람들과 조선의 모든 문화와 진기한 물산이 오가는 대동맥이었다. 나라님이 살고 있는 한양 땅을 밟는 백성들에게 도성과 궁궐은 감동과 놀라움 그 자체였으리라.
- 98일 만에 쌓아 올린 한양도성의 명과 암
“종묘(宗廟)는 임금의 조상(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고, 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치와 행정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 이 세 가지는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이었다.” [태조실록] 1394년(태조3년)
1392년 개성에서 한양으로 천도한 태조 이성계는 먼저 궁궐과 종묘사직을 완성한 후 곧바로 1395년(태조 4년) 윤 9월, 도성조축도감(都城造築都監)을 설치하고 도성축조를 시작했다. 인왕산과 안산, 백악산 중 과연 어떤 산을 한양의 주산으로 삼을 것인가 조정대신들은 논쟁이 분분했다. ‘군자는 남쪽을 향해 정치해야 한다’는 유교 사상에 근거해 결국 ‘조선의 설계자’로 불리는 정도전(鄭道傳)의 의견대로 경복궁의 뒷산인 白岳山을 主山으로 정했다.
한양 외곽을 감싸는 삼각산, 관악산, 덕양산, 용마산 등 4개의 외산산 안쪽에 위치한 ‘백악(북악산) · 낙타(낙산) · 목멱(남산) · 인왕’의 내사산(內四山) 능선을 따라 성을 쌓기로 했다.
백악산 정상인 백악마루에서부터 동쪽으로 일주하면서 천(天), 지(地), 현(玄), 황(黃)의 천자문 순서로 글자를 붙여 나가며 구획을 나눴다. 5만9500척(약 18.6㎞)의 한양도성을 전국 각 군과 현에서 차출된 19만7400명이 약 600척(180m)씩 97개 구간으로 나눠 성을 쌓았다.
축조기간은 태조 5년(1396년) 음력 1월9일부터 2월28까지 49일간, 8월6일부터 9월24일까지 49일간 2회에 걸쳐 진행됐다. 농번기와 혹서기, 혹한기는 피하고 농한기에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속전속결, 불과 100여일 만에 한양도성의 기본형태가 완성된 것이다.
각 공사 구간에 판사(判事)를 비롯하여 12명씩 책임자를 두어 견고하게 축성하도록 책임을 맡겼다.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해당구역의 성벽에 관직과 군명(郡名)을 새겨 넣어 책임을 분명하게 했다. 오늘 날 ‘공사실명제’의 흔적은 순성길 중간 중간에서 볼 수 있다. 이처럼 한양도성은 태조 때 백성들이 온 힘을 모아 창축되었고 세종 때 개축, 숙종 때의 수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최 소장은 “한양도성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은 인왕산과 백악산 구간이다. 한양도성을 걸어보면 성벽과 성돌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다.”면서 “거친 화강암 돌에서 옥수수 같은 성돌 그리고 정방형 성돌까지 과학기술과 건축기술이 한 눈에 들어온다. 지진에 대비해 꺽쇠씩 돌들의 축성을 보면 조상들의 지혜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고 말한다.
한양도성은 8개의 성문(城門)인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북쪽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숙정문 · 흥인지문 · 숭례문 · 돈의문이다. 4대문의 이름은 유교의 5가지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문을 만들었다. 숭례문(崇禮門)의 예, 흥인지문(興仁之門)의 인, 돈의문(敦義門)의 의, 숙정문(肅靖門) 그리고 신(信)은 한양도성의 중심지에 보신각(普信閣)을 설치했다.
“북쪽의 문은 원래는 지(智)를 써서 소지문(昭智門)으로 해야 하는데, 지혜를 뜻하는 지(智) 자 대신 정(靖) 자를 썼다. 소지문으로 하면 백성이 똑똑해져서 다스리기 힘들기 때문에 ‘편안할 정(靖)’ 바꿨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최 소장은 설명했다.
4소문은 서북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창의문 · 혜화문 · 광희문 · 소의문이다. 이 중 소의문은 돈의문처럼 멸실되었다. 또한 도성 밖으로 물길을 잇기 위해 흥인지문 남쪽에 2개의 수문(水門)인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두었다. 그 외 6개의 치(稚), 2군데의 곡성(曲城), 봉수대(烽燧臺) 등의 시설이 있었다.
평균 높이 5~8m, 전체 길이 약 18.627km에 이르는 사적 제10호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오랫동안(1396~1907, 511년) 도성기능을 수행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다.
“태조 때 기틀을 마련하고 세종 때 개축 시에는 무려 32만 명이 투입되었고 단일 성곽으로 최다 인원인 50만 명이 동원되어 돌로 고쳐 쌓았다. 임진왜란·병자호란 후 숙종 때는 전면보수를 통해 방어적 기능을 강화하고 영조는 ‘도성수비론’을 내세우며 완비하는 과정으로 수축과 보수를 거듭하며 511년 동안 원형을 유지했다.”며 “이처럼 조선의 성벽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한양도성은 살아있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한양도성 유적 전시관에서 만난 한양도성도감 김기훈 학예연구사는 말한다.
- ‘성곽도시’ 서울의 어제와 오늘
한양도성은 1899년 도성 안팎을 연결하는 전차가 개통됨에 따라 성문이 먼저 본래 기능을 잃었다. 이후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 당한 직후 일본의 압력으로 성벽처리위원회가 급조되었다.
1907년 일본 왕세자 방문을 앞두고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양쪽 성벽이 철거되었고 이어 평지의 성벽들도 헐려나가면서 도성은 국운의 쇠락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성문도 온전치 못해 소의문은 1914년 헐리고 이어 돈의문도 1915년 헐값에 건축 자재로 매각되었다.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만들고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건설하면서 주변 성벽을 허물어 버리고 성돌을 석재로 사용했다. 해방 이후에도 6.25 전쟁으로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손상되었다. 전후에도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은 성벽을 담장 삼아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복구와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한양도성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지면서 훼철되는 아픔을 겪었다.
다행히 1968년 1•21 사태 직후 숙정문 주변에서 한양도성의 중건이 시작되었고 1974년부터는 전 구간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역사적 고증 없이 무분별하게 복원한 구간은 지금도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청계천 오간수문(2003년), 동대문역사문화공원(2008~2009년), 남산회현자락(2009~2014년) 발굴조사를 통해 백년의 아픔을 견뎌내고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도 600년 전 한양의 외곽 경계선이었던 한양도성은 전체 구간의 30%, 5.3km(2014년 기준)가 복원을 기다리고 있다.
백악에서 낙타산, 목멱산, 인왕산을 경계로 사대문과 사소문을 울타리처럼 감싼 안은 한양도성은 궁궐과 함께 도심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빌딩 숲 사이로 멀지않은 내사산 정상 따라 길게 이어진 고색창연한 성곽이 서울이 600년 고도(古都)임을 선명하게 말해준다. 오늘도 사람들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순성길에 오르며 '오래된 미래도시' 서울을 발끝부터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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